참선

퇴옹당 성철대종사 행장 -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탑

노하시원 2016. 10. 4. 00:58

 

“退翁堂 性徹大宗師 行狀(퇴옹당 성철대종사 행장)”

 

 

圓覺(원각)이 普照(보조)하니 寂(적)과 滅(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萬物(만물)은 觀音(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妙音(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眞理(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示會大衆(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宗門(종문)의 바른 眼目(안목)을 갖춘 性澈大宗師(성철대종사)께서는 본디 굳세고 우뚝 하시여 그 모습은 고고하고 청수하며 생각과 사려는 호수처럼 고요하시니, 戒法(계법)과 禪定(선정)의 行履(행리)는 인간 천상에서 엿볼 수 없고, 慈悲(자비)의 妙用(묘용)은 일체 중생이 다함께 우러러 보았다.

 

한 말씀 한 구절과 한 기틀 한 경계에 人天(인천)의 眼目(안목)을 여시니, 어느 때는 棒喝(봉할)의 本分手端(본분수단)으로써 납승을 제접하고, 어느 때는 三玄三要(삼현삼요)와 四料捒(사료송) 四賓主(사빈주)의 臨濟宗旨(임제종지)로써 向上一路(향상일로)를 闡掦(천척)하여 獅子吼(사자후)를 吐(토)하시니 이는 佛祖(불조)의 행리이고 이 시대 乾坤(건곤) 獨步(독보)의 禪機(선기)를 떨침이었다.

 

退翁堂 性徹大宗師(퇴옹당 성철대종사)께서는 1912년 任子(임자) 陰(음)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陜川李氏(합천이씨) 宗門(종문)에서 태어나시니, 嚴父(엄부)는 尙彦(상언)이시고 慈母(자모)는 晉州(진주) 姜氏(강씨)이시며 俗名(속명)을 英柱(영주)라 하였다. 유년에 小學校(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資治通鑑(자치통감)을 마친 뒤로는 남에게 더 이상 배운 바 없이 스스로 학문을 대성하셨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모든 經書(경서)와 新學問(신학문)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眞如(진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에 공허함을 느끼던 즈음 한 노스님으로부터 永嘉大師(영가대사)의 證道歌(증도가)를 받아 읽고 홀연히 心眼(심안)이 밝아짐을 느꼈다.

 

20세 전후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지리산 大源寺(대원사) 塔殿(탑전)에서 정진한지 40여일만에 문득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話頭(화두)가 動靜一如(동정일여)에 이르게 되었다. 화두참선에 확신을 가지고 1936년 丙子(병자) 봄 25세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면서 出家詩(출가시)를 읊었다.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홀로 걸어가노라)이로다.

 

 

그 해 봄 해인사 白蓮庵(백련암)에서 東山(동산)스님을 은사로 受戒得度(수계득도)하고, 같은 해 雲峰和尙(운봉화상)으로부터 比丘戒(비구계) 수지하였다. 이후 梵魚寺(범어사) 金魚禪院(금어선원), 金剛山(금강산) 摩訶衍(마하연) 등 남북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셨으며, 29세 때 대구 桐華寺(동화사) 金堂禪院(금당선원)에서 마침내 漆桶(칠통)을 打破(타파)하고 悟道頌(오도송)을 읊었다.

 

黃河西流崑崙頂(황하서류곤륜정,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日月無光大地沈 (일월무광대지침,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遽然一笑回首立 (거연일소회수립,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靑山依舊白雲中(청산의구백운중,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이로다.

 

이후 10여년간의 행각 중에도 長坐不臥(장좌불와)로 고행 정진하시니, 언제나 안목이 투철하여 그 禪機(선기)를 당할 자가 없었다.

 

8.15광복 직후 문경 鳳巖寺(봉암사)에서 共住規約(공주규약)을 만들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높이 드니, 性徹(성철) 牛峰(우봉) 靑潭(청담) 慈雲(자운) 香谷(향곡) 普門(보문) 月山(월산) 道雨(도우) 性壽(성수) 慧庵(혜암) 法傳(법전) 등 大德(대덕)들이 동참하여 佛祖(불조)의 正法(정법)을 發揚(발양)하므로써 敎團淨化(교단정화)의 楚石(초석)을 다졌다.

 

1955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시고, 팔공산 聖殿庵(성전암)으로 옮겨 철망을 치고 10년을 洞口不出(동구불출)하며 道光(도광)을 숨기셨다.

 

1967년 伽倻山(가야산) 海印叢林(해인총림) 초대 方丈(방장)에 추대되시고 白日法門(백일법문)을 열어 無量衆生(무량중생)을 制度(제도)하기 시작하셨다.

 

1981년 大韓佛敎(대한불교) 曹溪宗(조계종) 제6대 宗正(종정) 추대되시고 1991년 제7대 종정에 재추대되셨으며, 宗門(종문)의 이론서인 禪門正路(선문정로)를 저술하고 上堂(상당) 法語集(법어집)인 本地風光(본지풍광)을 발간하시고는 부처님께 밥값 하였다고 흔연해 하셨다.

 

이후 스님의 말씀과 종문의 핵심 어록에 대한 스님의 강론을 엮은 10여종의 책과 스님께서 몸소 선정하여 번역하게 한 선종의 주요 어록 37권을 함께 묶은 禪林古鏡叢書(선림고경총서)를 발간하니, 宗通(종통)과 說通(설통)을 겸비하신 스님께서 한국 현대선종에 끼치신 바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또 스님께서는 종단행정에는 일체 관여치 않으시고, 國政諮問委員(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나 전혀 나아가지 않으시며, 산승은 오로지 청산에 머물 뿐이라고 하셨다.

 

結制(결제) 安居(안거) 중에는 산중에 비구, 비구니를 비롯한 四部大衆(사부대중)이 항상 5백명 넘게 雲集(운집)하여 精進(정진)하였으니, 오늘날 동양 삼국에 이와 같은 예는 없다 할 것이다.

 

매 결제 철마다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七日七夜(칠일칠야) 勇猛精進(용맹정진)은 철저한 수행정신을 진작시키고 曺溪門下(조계문하)의 禪風(선풍)을 드날리게 하는 스님의 매서운 家風(가풍)을 이루었다.

 

스님께서는 선종의 바른 이념이 六祖(육조) 慧能(혜능)의 頓悟頓修思想(돈오돈수사상)에 있음을 밝히시고, 8백년 동안 한국선종을 물들여 온 普照(보조)의 頓悟漸修設(돈오점수설)을 논파하여 宗旨(종지)를 바로 세우시니 이는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밝힘과 같았고, 修行衲僧(수행납승)과 宗徒(종도)들에게 바른 宗趣(종취)를 고취시켜 活鱍鱍(활발발)한 祖師家風(조사가풍)을 회복하신 것이다.

 

또한 스님께서는 평생 戒律(계율)을 엄격히 하셨고, 누구든 佛前(불전)에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話頭(화두)를 주지 않고 친견을 허락지 않았으며, 평생 재물을 멀리 하셨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직접 佛供念佛(불공염불)을 해 주지 않았으며, 각자 스스로 參禪精進(참선정진)과 懺悔祈禱(참회기도)를 하고 그 공덕은 남에게 베풀라고 이르셨다.

 

젊었을 때 십수년간 生食(생식) 또는 僻瑴(벽곡)으로 지내셨으며, 이후 10여년간 無鹽小食(무염소식)으로 일체 간식하지 않으시고, 廣木(광목) 麻布(마포) 이외는 입지 않으시고, 거처하는 건물에 단청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출가하여 처음으로 삭발하고, 말년에 20년을 주석하시던 해인사 堆雪堂(퇴설당)에서 1993년 11월 4일 새벽에 臨終偈(임종게)를 쓰시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들을 속여서)

彌天罪業 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焰阿鼻恨萬端(활염아비한만단,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래벽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잠시 좌정하시다가 시자들에게 참선 잘 하라는 당부를 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니 世壽(세수)는 82세요, 法臘(법랍)은 58세로 그 모습이 거룩하고 또 거룩하셨다.

 

7일 葬中(장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일곱 차례나 放光(방광)을 하시니, 그 異蹟(이적)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하였다.

 

茶毘式(다비식)에는 30여만명이 운집하여 해인사 30리 밖까지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니 그 장엄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다비 후 일백여과의 舍利(사리)를 얻어 七齎(칠재) 동안 親見法會(친견법회)를 열자 종교를 초월하여 백여만 명의 대중이 모여들어 찬탄하였으니, 이는 불교사에 드문 일이었다.

 

큰 스님의 무소유와 절약의 정신은 바로 이 시대 부처의 모습이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울리고 있다.

 

이에 우리 후학들은 이 곳 가야산 雲陽臺(운양대) 기슭에 옛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 현대적으로 具顯(구현)한 스님의 사리탑인 日月無光(일월무광) 3층탑에 향 사루어 올리며 스님의 크신 행적을 간략히 새긴다.

 

불기 250(1996)년 丙子(병자) 가을

後學(후학) 東谷(동곡) 一陀(일타)는 머리 숙여 절하옵고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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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 - 나를 찾아가는 선의 공간”

 

 

성철스님(1912년-1993년)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조계종의 6대 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같은 사자후로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치셨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정・혜 삼학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스님의 열반 7주기에 회향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살아 있는 선의 공간이다.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