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의 고승' 경봉 스님
'현대불교의 고승' 경봉 스님
현대의 고승인 경봉(鏡峰)의 본관은 광주(廣州) 김씨(金氏)이고, 속명은 용국(鏞國)이다. 법호는 경봉이고, 법명이 정석(靖錫)이며, 시호(詩號)는 원광(圓光)이다. 그는 1892년 4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아버지 영규(榮奎)와 어머니 안동(安東) 권씨(權氏)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유달리 총명했던 경봉은 7세 때부터 강달수(姜達壽) 선생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나 15세 되던 해 8월 모친상을 당한 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생사의 이치를 깨닫는 길을 찾고자 결심하였다.
경봉은 이듬해인 1907년 6월 출가하여,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서 성해(聖海) 화상(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청호(淸湖) 화상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 후 1908년 3월 경봉은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 (明新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워 3년 만에 졸업하였다. 1911년 4월 경봉은 해담(海曇) 화상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이듬해부터 3년 동안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大敎)를 수료하였다.
경봉이 강원을 졸업하자 성해화상은 그에게 통도사 행정사무를 맡겼다. 그가 24세 되던 해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참선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통도사를 떠났다.
양산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 수학하고, 해인사에서는 제산(霽山) 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하였다. 당시 그는 졸음과 망상을 쫓기 위해 머리를 기둥에 찧기도 하고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며 수행했으며, 한겨울에 얼음덩어리를 입 속에 물고 용맹정진했다.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는 만봉(萬峰) 선사와 남천(南泉) 선사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자기를 운영하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참된 주인공'을 찾을 것을 결심한 경봉은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며 정진을 거듭했다.
공부가 순일하게 이루어지자 경봉은 1916년 여름 통도사로 돌아왔다. 안양암(安養庵)에서 해담화상의 지도를 받으며 6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오로지 참선에 전념하였다. 이윽고 경봉은 1917년 1월 마산 포교사로 파견되어 불사와 포교에 힘썼으며, 1919년 10월부터 2년 동안 내원사 주지로 있었다. 1925년 통도사 극락암(極樂庵)에서 경봉은 양로염불만일회(養老念佛萬日會)를 창설하여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후 1927년 12월 7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은 21일간 화엄경산림법회(華嚴經山林法會)를 개설하여 해담화상과 함께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았다. 법회를 시작하면서 화두에 몰두한 경봉은 철야정진하다 마침내 12월 13일 새벽 2시 30분 무렵 갑자기 방안의 촛불이 춤추듯 하는 순간, 눈앞이 환히 밝아지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솟구치는 기쁨을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我是訪吾物物頭)/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目前卽見主人樓)/
껄껄껄 이제야 만나 의혹 없어지니(呵呵逢着無疑惑)/
우담바라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優鉢花光法界流)'
라고 노래했다.
그 뒤에도 경봉은 만공(滿空) 한암(漢巖) 용성(龍城) 제산(霽山)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보임(保任)공부와 정진을 계속했다. 특히 전강(田岡) 선사와는 법 형제를 맺을 정도로 우의가 깊었다. 그러는 한편 경봉은 신도들에게 관음기도와 나반존자(那畔尊者) 신앙을 강조했다.
경봉은 1932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했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 주지를 맡기도 했으며, 1941년 3월에는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두 달동안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극락암에 머물며 수행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949년 4월 경봉은 다시 통도사 주지로 보임되어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0년 3월에는 밀양의 무봉선원으로 거처를 옮겨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62세 되던 1953년 11월 경봉은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며, 이 곳에 삼소굴(三笑窟)이라는 토굴에서 입적하던 날까지 30여 년을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면서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꾸밈없는 경지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하였으므로 항상 주변에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경봉은 82세 되던 1973년부터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90세의 노령에도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명 이상의 대중이 참여하였다. 당시 너무나 자상하게 법문을 해 '살아있는 자비보살'로 불렸던 경봉은 신도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기를 즐겼다. 특히 먼 곳에서도 불법에 관해 물어오면 언제나 친절히 답장을 해주었다고 한다. 경봉은 신도들에게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번 멋지게 해 보거라"고 말했다. 여기서 '한바탕 멋진 연극'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성실하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한편 경봉은 한시와 시조, 필묵에도 깊은 경지에 다라라 있었다. 또 공부에 진척이 없다고 찾아오는 스님을 대할 때면 "바보가 되는 데서 참사람이 나오는 법이니, 나무칼로 물 베듯 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단박에 결판을 지으라."고 가르쳤다.
1982년 7월 17일 경봉이 미질(微疾)을 보이자 문도들이 모였다. 상좌 명정이 "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 모습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웃으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고 말했다.
이윽고 그 날 오후 조용히 입적하니 세수 91세, 법랍 75세였다. 그의 영결식에는 전국에서 3만여 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애도했다. 통도사 연화대에서 다비하였으며, 1984년 6월에 통도사 일주문 밖에 부도탑과 비가 세워졌다.
제자로는 벽안(碧眼) 명정(明正) 경산 벽산 도명 성수 무송 법연 효성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 한시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1984) 등이 있다.
특히 그는 1910년 1월부터 1976년 4월까지 매일의 중요한 일을 초서(草書)로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중요한 부분만 정리하여 '삼소굴일지'(三笑屈日誌)(1985)로 출간되었다.
180㎝나 되는 훤칠한 키, 부리부리한 눈, 호탕한 웃음과 우렁찬 목소리로 기억되는 경봉은 풍류를 즐기던 '영축산 도인'이요, '통도사 군자(君子)'였다.
특히 그는 시 잘 짓고 글씨 잘 썼던 인물로서, 수많은 한시와 현판 글씨를 통해 깨달음의 향기를 남겼다.
나아가 경봉은 참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되 경전공부와 염불도 겸했고, 흔히 선승들이 기피하는 주지직과 포교사 역할까지 기꺼이 맡았던 대승보살(大乘菩薩)이었다.
위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이상적인 불제자의 삶을 몸소 실천했으며, 오랫동안 승속(僧俗) 마음 깊은 곳에 지혜의 등불을 밝혔던 선지식(善知識)이었다.
따라서 경봉은 한국 선종사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로서 청정수행과 교화행의 모범을 보인 위대한 인물이라 하겠다.
김 탁(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