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스님 능가경 법문 중 괴테의 시 "하나" - 2016. 6. 5. 홍제사 능가경 법문
오염된 연을 따를 때에는 미혹해서 아뢰야가 되고,
청정한 연을 따를 때에는 깨달아 여래장이 된다.
본말이 이리저리 바뀌지만
오직 일심일 뿐 끝내 둘이 아니니라.
여러분이 석종사를 가려고 하면 바로 간다.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다.
서울역도 바로 간다.
우리 마음의 세계 본질의 세계에서는
거기까지가 나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다, 완전한 자유라는 말이다.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인과 과가 동시구나,
고로 내 생각을 오염된 연을 따를 때에는
그 생각이 아뢰야가 되고,
청정한 연을 따를 때에는 여래장이 된다.
내 감정을 따르면 잠재의식만 늘어가서
감정의 노예가 된다.
이 감정에는 의식이 없다,
알아차리는 것은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내 주인 노릇을 하면
여래장 부처가 된다, 대자유가 된다.
미국에 가서 법문하고 나오는데
변호사와 의사가 한마디만 해달라고 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라.
고요해져서 자신에 돌아가면
스스로 답을 볼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스승님인 일타스님과 달리
미국에 태어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들은 내생과 전생을 믿지 않는다.
미래가 내생이다. 시간만 볼 때는 미래이다.
시간만 볼 때는 과거이고
거기에 공간이 같이 하면 전생이라고 한다.
내가 감정을 따라가느냐
내 본질에 주인노릇하느냐 이 차이뿐이다.
둘이 아니다, 물이 얼음이고 얼음이 물이다.
얼음과 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온도 변화만 있을 뿐이다.
자기자신은 얼음되는 줄도 모르고
물이 되는 줄도 모른다.
부처님만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래서 '무생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중생의 몸에도 열반이 있으니 곧 감정 안에 본질이 있고,
중생이 열반의 작용이니 곧 근본 본질 안에 감정이 있구나.
둘이 아니다.
감정을 싫어할 것이 아니라
감정과 싸울 것이 아니라
내 본질만 따라가도록 노력을 하자.
탐욕이 그대로 도이니
곧 지말 안에 근본을 함유한 것이고,
탐욕이 그대로 도의 작용이니
곧 근본 안에 지말을 함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범부가 항상 고요 속에서 살고 있구나.
작은 비중 뿐인 환영에 속아서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완벽한 고요가 벌써 자리해 있구나.
묻기를 '항상 어떤 고요에 들어있습니까?' 하자
'무너지지 않는 영원히 법성의 삼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지말 안에 근본을 함유한 것이다.
법성 안에 중생을 함유한다는 것은
근본 안에 지말을 함유한 것이니,
이 둘은 마치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다.
내기 가끔 루미의 여인숙이나
괴테의 하나라는 시를 읽어주는데
루미나 괴테라는 시인은 이 근처까지 갔구나,
근본까지 갔구나 생각한다.
오늘은 괴테의 시 "하나"를 외워드린다.
괴태의 시 "하나"
모든 것이 제멋대로 구르는 듯 해도
사실은 하나로 얽혀 있다네
우주의 힘이 황금종을 만들어 이들을 떠안고 있다네.
하늘 향기 은은히 퍼져 나가니
그 안에 우주가 떠안기도다.
모든 것이 향기를 쫓아 조화로이 시공을 채우노나.
휘몰아치는 생명의 회오리 속에서
나도 파도도 다 함께 춤춘다.
삶과 죽음이 있건만
영원의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누나
변화하고 진동하는 저 힘이 내 생명의 원천.
오늘도 먼동이 트는 아침에
거룩한 생명의 옷을 짜누나.
괴테의 시가 아름답지만
부처님 경전보다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