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암과 경허스님이야기]]
10월 8일 한국의 달마 경허스님의 오도후보임지이자 3명의 제자인 만공스님, 수월스님, 혜월스님과 지낸 곳으로 유명한 충남 서산 천장암에 다녀왔습니다.
천장암은 '하늘이 감춰놓은 절'이라는 뜻처럼 산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절 입구에 있는 계단에서도 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것 같은데 막상 계단을 다 올라가보니 평지같았습니다. 공기가 정말 맑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시원하고 부드러웠으며, 오래된 나무가 많았습니다. 햇볕이 이 곳에 유난히 많은 빛을 할애하며 오래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으나 앞이 탁 트여서 전망이 좋아 멀리 산이 보이고 혜월스님의 참선동굴에서는 서해바다까지 보였습니다.
절 곳곳에 경허스님, 만공스님, 수월스님, 혜월스님의 발자취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 평도 안 되는 크기의 경허스님의 방과 그 옆에 만공, 수월, 혜월 스님이 경허스님을 봉양 하던 방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방문 위에는 우리 법성선원 법요집에 있는 경허스님 '참선곡'이 씌여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낡은 좌복이 그대로 놓여 있어서 방금 전까지 4분이 정진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방 옆에는 수월스님께서 천수대다리니주삼매에 들어 방광을 하셨다는 부엌이 있었고, 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혜월스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바위동굴이 남아 있었습니다. 경허스님의 제자들 중 여기 계셨던 만공월면, 혜월혜명, 수월음관스님은 특히 뛰어나 경허스님의 3개의 달로 불립니다. 경허스님 기념탑, 수월스님 기념탑, 2층높이의 새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 같았습니다. 경허스님이 직접 쓰신 염궁문이라는 편액이 있는 선방에서는 한국 선종의 중흥을 이끈 4분의 선지식의 선맥을 이어받고자 선객들이 수행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여건이 된다면 며칠 머물면서 수행을 하고 싶은 절이었습니다.
경허스님은 1846년에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법명은 동욱이었다가 나중에 성우로 바꾸었고, 경허는 법호라고 합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삼보에 귀의한 모친의 인도로 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친형님이 바로 천장암의 주지였던 태허스님입니다. 경허스님은 경기도 광주 청계사에서 출가하고 이후 동학사로 가서 강주가 되었고, 테허스님은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하고 이후 모친을 모시면서 천장암의 주지로 있었습니다.
경허스님은 일자무식어어서 청계사에 온 선비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가르치자마자 바로 익히고 다 외워버려 법기가 남다름을 일찍이 인정받았습니다. 경허스님이 그 선비에게 매일 짚신을 지어 올린 일화는 최인호의 '길없는 길'이라는 소설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후 스승인 계허스님이 환속하면서 동학사 만화스님께 보냈는데 만화스님은 당대의 아주 뛰어난 강백이었다고 합니다. 만화스님이 가르쳐 보니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고 경소를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워 대중들이 모두 미증유의 일이라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학문이 높아 유가와 노장까지 정통하였습니다. 23세에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여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스승인 계허스님이 보살펴 주신 일이 생각나서 스승을 뵙고자 길을 나섰는데 어느 마을에 이르러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비를 피하고자 처마 밑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내쫓았고 동네 수십집이 모두 다 스님을 내쫓아 이유를 물으니 그 마을은 전염병 콜레라로 사람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 사지에 들어왔는가 ?"라는 말에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흡사 죽음이 임박하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어 세간의 일들이 모두 덧없는 꿈같았습니다.
경허스님은 "이 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조사의 도를 찾아서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발심을 한 후에 참선을 위하여 적절한 화두(공안)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유명한 강주로 학문이 높아 교학의 습기로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걸리는 공안이 없었는데 딱 하나 영운선사가 '어떤 것이 불법대의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말씀하신 '여사미거마사도래(나귀의 일이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이르렀다)'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만난 듯 도무지 알 수 없어 "이 무슨 도리인고?"라고 참구하였습니다. 동학사로 돌아와 대중을 모두 해산하고 화두를 참구하여 석달만에 화두가 순일하였습니다. 이 처사라는 사람이 어느 스님이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된다'는 말에 크게 꾸짖으며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활연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때가 고종 16년 1879년 11월 보름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 선종의 선맥이 끊어진 상태여서 경허스님은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달아 선지식의 인증은 없었으나, 황벽스님께서 백장스님을 찾아가 마조스님의 '할'을 한 기연을 전해듣고 깨달았듯이, 경허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법을 이었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인증을 받았습니다. 경허스님의 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한국 선종이 중흥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경허스님의 제자들인 만공, 수월, 혜월, 한암, 용성스님 등 많은 선지식이 배출이 되었으며, 그 제자들에게 법맥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니, 과연 '한국의 달마'라는 칭호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법성선원에 모여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경허스님 덕분입니다. 정기참선일마다 듣는 녹음법문을 하신 송담스님은 경허-만공-전강-송담으로 이어진 법맥을 이으신 분입니다.
경허스님은 이듬해 형님이 있는 천장암으로 와서 보임을 하면서 오도송과 오도가를 지었는데, 오도송은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 유월이라 연암산(천장암이 있는 산) 아랫길에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이고, 오도가는 이 오도송 앞에 긴 시가 더 있습니다. 이 오도송은 후의 선지식들이 모두 오도송으로 인정을 하였는데, 전강스님만은 "내가 경허스님이라면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대신 '농부들이 한가로이 여여~ 여여~'로 농부들이 농가를 부르는 소리를 바로 붙이겠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경허스님은 천장암에 계시는 동안 한 평도 안 되는 방에서 한 벌의 누더기 옷을 입고 몇 년을 찰나와 같이 지내신 후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이 오매 어느 곳이건 꽃이 피는 것을. 누가 나의 경지를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해탈의 노래)라 하리라." 라는 절구 한 수를 읊으시고는 주장자를 꺾어 문밖에 집어던지고 산을 나와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며 무애행을 하셨습니다. 경허스님의 무애행에 관하여는 수월, 혜월, 만공만은 그 뜻을 알았으나, 같은 제자인 한암, 용성스님은 스승의 무애행을 기행으로 평가한 듯합니다. 우리 정민스님께서도 경허스님의 무애행을 높이 평가하여 민중들에게 깨달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어깨 높이로 내려가신 진정한 교화라고 하셨습니다. 경허스님은 도회지에서 이름을 알리기 보다 농촌의 민중과 함께하셨습니다. 경허스님이 무애행을 하지 않을 때에는 숨이 겨우 붙어있을 정도의 음식만 드시고 안거를 하시고 종일 문을 닫고 몇 년을 찰나처럼 정진하신 것을 보면 스님의 진심이 담긴 무애행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경허스님은 나한개분불사의 증명법사로 갔다가 자신의 이름이 높아진 것을 것을 알고 이를 두려워하면서 "식견은 앝고 이름은 높고 세상은 위태하니 모르겠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 어촌과 주막에 어찌 그런 곳 없으랴만 이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날까 두럽구나."라는 시를 짓고 1904년 봄 석왕사 오백나한 개분불사 후 종적을 완전히 감추었습니다.
이후 경허스님은 이름을 감추고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함경도 갑산 강계 등지를 오가면서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키는 훈장으로 살았습니다. 1910년 수월스님이 기어이 경허스님을 찾아내어 경허스님을 찾아갔지만 문고리를 붙잡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한사코 부정하니 수월스님이 스승의 뜻을 헤어려 포기하고 근처에 머물면서 스승을 멀리서 돌봤습니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에서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ㅇ(일원상을 그리심)" 라는 열반송을 쓰신 후 그대로 오른쪽으로 누워서 입적하셨습니다. 이후 수월스님이 수덕사 정혜선원에 있는 만공스님께 경허스님께서 갑산에서 박난주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입적하신 사실을 알리니 만공 혜월 두 스님께서 바로 거기로 가서 스승의 시신을 찾아 다비를 하고 임종게 등 경허스님의 글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경허스님의 글은 '경허집'에서 전합니다.
경허스님의 제자로 전법제자인 만공스님은 워낙 유명하시니 행장으로 대신합니다. 천장암에서 출가하신 수월스님은 일자무식으로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만 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여러 차례 방광으로 유명하셨고 경허스님처럼 늘 이름을 감추고 사셨습니다. 종적을 감춘 스승을 끝까지 찾아내어 제자의 도리를 다하고 스승의 입적사실을 만공스님에게 알린 후 간도지방으로 가서 국경을 넘어 오는 한민족을 위하여 주먹밥과 짚신을 무한 제공하신 일화는 유명합니다. 혜월스님은 천장암에서 경허스님의 짚신을 삼다가 깨달음을 얻으셨고 늘 밭을 개간을 하신 일, 천진행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만공스님은 공양주, 수월스님은 부목 등 각종 울력, 혜월스님은 개간 등 밭을 가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하셨다고 하니 경허스님의 제자들의 수행정신이 남달라 감복할 따름입니다.
천장암에서 경허스님, 만공스님, 수월스님, 혜월스님을 만나고 오니, 새삼 선어록에 있는 중국의 선사들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서 이런 분들이 가까운 시간 내에 계셔서 어렵지 않게 이 분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고 이분들에 의하여 선맥이 이어져 지금 우리가 부처님 정법인 참선법을 만나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성불하십시오. _()_
불설비유경과 안수정등도 (0) | 2016.11.16 |
---|---|
십우도(十牛圖) (0) | 2016.10.27 |
만공월면대선사행장 (0) | 2016.10.09 |
수월스님행장 (0) | 2016.10.09 |
퇴옹당 성철대종사 행장 - 해인사 성철스님 사리탑 (0) | 2016.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