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유식의 삼성설 의타기, 변계소집, 원성실
★ 『佛敎의 無我論(이화학술총서)』
☆SUNNY e-mail: mickeynova@daum.net☆
가)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근본불교에서 연기는 일체 존재가 그 자체의 자성을 가지지 않고 중연 화합하여 생기함을 의미한다. 어느 것도 그 자체의 자립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인연하여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인연 화합물인 현상 세계는 모두 ‘無自性(무자성)’의 ‘假(가)’인 연기적 성격을 유식은 다른 것인 ‘他(타)’에 의거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依他起性(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연을 따라 생하므로 의타기라고 한다.』
그런데 근본 불교가 설하는 연기의 12지 중에 하나가 바로 ‘識(식)’이다.
명색과 유근신을 비롯해 현상세계를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연을 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현상 세계는 식에 의거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식을 떠난 객관적 실유[實有]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실유[非實有]이다. 유식은 이 점을 강조하면서 현상 세계를 성립시키는 연기를 의타기성으로 해석한다. 식의 삼성에서 바로 ‘의타기성’이 ‘유식성’이다.
즉 자아와 세계는 마음을 떠난 객관 실재가 아니므로, 마음이 그린 전변 결과이고,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범부는 이런 유식성을 모르기 때문에 ‘의타기성, 연기성’을 모른다. 근본 불교에 있어서 일체가 ‘연기’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름이 바로 ‘무명[無明]’이고 이 무명에 근거해서 중생의 번뇌와 업이 발생하고 업에 따라 윤회가 성립한다. 유식에서는 연기를 모름이 곧 의타기성을 모르는 것이고 유식성을 모르는 것이다. 유식성을 모르는 것은 자아와 세계, 아와 법을 실법으로 간주하여 아집과 법집을 일으키며, 그 분별 집착으로 인해 번뇌 속에서 괴로워하며 업을 짓고 윤회하는 것이 성립한다.
이렇게 의타기성을 모르기 때문에 성립하는 식의 두 번째 특징인『遍計所執性(변계소집성)』은 현상 세계가 무자성이고 비실유임을 모르고, 치우쳐 분별함[변계]이며, 그 분별에 따라 집착하게 되는 것[변계소집]이다. 그것은 아무런 자성도 실유성도 없는 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므로 망분별이고 망집이다.
『각종 변계[분별]에 의해 각종 사물을 변계한다. 그렇게 변계소집된 것은 자성이 없다.』
변계소집성은 식의 실성인 의타기성(유식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발생한다. 현상 세계, ‘아’와 ‘법’이 아뢰야식의 ‘식소변’ 혹은 ‘견분(주체)’과 ‘상분(객체)’임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실유의 존재로 착각하여 실체화 하여서 생기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식소변이 미세하기 심층의 식으로 전체에 퍼져 있을 뿐 의식적 분별을 따라 경계 지어져서 표층으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변계소집하는 식은 심층의 아뢰야식을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표면의 거친 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유식성을 모르는 변계소집의 식을 ‘의식과 말나식’이라고 설하고 있다.
『오직 의식과 말나식의 심품에만 능히 변계함이 있다.』
심층의 아뢰야식의 전변 작용을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과 말나식은 모두 망분별과 망집착을 일으키는 거친 식으로 그런 분별중 의식의 분별은 ‘의식적인 사유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분별로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거나 혹은 특별한 이론 체계를 배움으로 행하게 되는 분별과 집착이다.
말나식의 분별 집착은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배우기 전에 이미 선천적으로 타고난 분별과 집착이다. 사람은 배우거나 배우지 않거나 이미 세계는 저 밖에 있고 나는 그 세계 안에 있으며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망분별과 집착을 가지고 산다. 또 다시 그런 자연적 망분별과 집착에 기반을 둔 이론 체계며 유물론이나 실재론적 체계들을 설립하고 그것을 전파하거나 배움으로 다시 그런 망분별과 집착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아뢰야식을 자각하지 못하므로 ‘아’와 ‘법’이 실재가 아니라 바로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의 발현일 뿐이라는 것, 그 점에서 거짓 자아와 거짓의 대상임을 알지 못하여 분별집착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 의타기성, 원성실성
의타기를 안다는 것은 곧 연기와 유식성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와 세계가 아뢰야식의 식소변인 견분과 상분임을 아는 것이고
종자의 세력에 의해 견분(주)과 상분(객)으로 이원화하면서 ‘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아뢰야식의 활동성 자체는 아뢰야식의 자증분이다. 연에 따라 의타기하여 나와 세계를 그려내는 것으로, 그 의타기를 모르기에 나와 세계를 단단하고 견고한 세계로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같다. 의타기하여 나와 세계를 그려내는 아뢰야식의 활동은 꿈을 꾸되 그것이 꿈인줄 모른채 계속 꿈속을 헤매게 되는 ‘꿈꾸는 의식’인 것이다.
식전변 하되 그 세계가 식소변이라는 것을 모른 채 무명 속에서 세계에 매여 윤회하는 것이다.
유식이 아뢰야식의 의타기성을 설함은 그 의타기의 연기를 고정불변의 법칙으로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타기의 꿈이라는 것을 알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이며 아뢰야식의 의타기를 의타기로 깨달아서 꿈을 꿈으로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꿈을 꿈으로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것이다. 아뢰야식의 자증분[自證分]을 의타기의 활동성으로 자각하는 증자증분[證自證分]에 해당하며 이는 곧 의타기의 꿈을 깨는 것, 의타기의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의 증자증분은 세계를 형성하면서 세계를 보는 눈인 아뢰야식이 보는 눈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냥 세계를 보는 눈으로서 계속 보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는 눈 자신을 바로 자각하고 의식한다.
불교에 따르면 ‘자아’란 처음부터 ‘세계를 보는 눈’으로 마음으로, 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보여진 세계 속 어디에도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아’를 설한 것이다. 불교는 '보여진 세계‘로부터 물러나 지기 자신을 ’세계를 보는 눈‘으로 자각하기를 강조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보여진 세계‘와 ’보여진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고 고통을 벗으며 업을 짓지 않아 자유로워진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를 보는 눈’으로 존재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눈’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세계 속의 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얽매이고 집착하고 윤회에 빠져든다.
자신이 보는 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세계가 보여진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유식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타기성을 의타기성으로 알게 되면, 변계소집성을 떠나게 되며, 이를 『圓成實性(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원성실성은 ‘아’와 ‘법’이 ‘실아’와 ‘실법’이 아닌,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임을 깨닫고 ‘자아’와 ‘세계’가 식소변임을 참되게 아는 것이다.
이는 식이 자신을 보여주고 나타낸 세계 속에서 찾지 않으며 식이 ‘근[안이비설신의]’과 경[색성향미촉법]‘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나 더 이상 보여지는 세계와 감각 기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공[空]‘을 여실히 깨닫는 것이다. 즉 지각의 범위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해탈의 식이다.
『二空(아공, 법공)에서 나타나는 원만한 성취가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이므로 원성실성이라 한다.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서 앞의 변계소집성을 멀리 떠난 것이다. 두 가지 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를 그 자성으로 삼는다. 근경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난 식, 번뇌와 집착을 벗은 식은 곧 해탈의 식이고 진여심이다. 일체의 유식성을 깨달아 변계소집을 벗어난 마음이 원성실성의 진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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