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선사 선어록 “전인미답지를 일러주마‘ 중에서-
일구(一句)는 평상심입니다. 번뇌 없이 생활하는 도인들의 일용지사(日用之事)는 깨달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상생활이 그대로 평상심입니다. 금강경 첫머리에도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부좌이좌(敷座而坐)까지가 그대로 평상심 도리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의 일거일동이 전부 일구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인 스님네가 막 잡아 쓴 선(禪)입니다. 번뇌가 없는 절대성의 자리에서 나오는 용심(用心)인 것입니다. 그것이 말후구 소식입니다. 최초구로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문의 도는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도인의 분상에서는 잡아쓰면 그대로 도입니다. 큰스님을 시봉하는 이는 어른이 주무시고 일어나면 세숫물을 갖다드리고, 세수가 끝나셨으면 수건을 갖다드립니다. 그 일상생활이 그대로 도입니다. 무슨 대단한 특별한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쉬운데도 중생들이 도를 모르는 것은 번뇌를 가지고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은 바로 이 도리를 설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셔서 번뇌가 없는 자리에서 생활하시는데, 우리 중생들은 언제 부처님과 같이 되겠습니까?”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어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두정(話頭定)에 들어야 비로소 부처님이 대답하신 이치가 드러납니다. 대승경전의 알음알이를 붙여 가지고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하는 것은 도깨비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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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선은 평등지가 되고 조사선은 차별지가 됩니다. 일구, 즉 조사선의 체(體)와 용(用)이 있고 이구, 즉 여래선의 체와 용이 있습니다. 대승경전에 나타난 모든 말씀은 여래선 도리로서 체와 용을 나타낸 것입니다. 조사선은 최초구(最初拘)와 말후구(末後句)로 나타냅니다. 최초구는 체를 나타내고, 말후구는 용을 나타냅니다. 차별지인 말후구의 낙처(落處)를 바로 봐야 대승경전의 뜻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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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분상에서는 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도이고 평상심 그대로가 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에 가고, 오고, 앉고, 일어서고, 눕고, 설법하고, 발 씻고 하는 일거일동이 전부 선의 경지입니다. 그것이 계계승승(繼繼承承) 내려와서 중국에서 도인이 쏟아졌습니다. 깨달아서 마음대로 법을 잡아 쓰는 것인데, 여기에 인도선 다르고 중국선 다르다는 말은 붙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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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본심자리를 그대로 나타낸 경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화두라고 하면 옛날 선사 스님들이 던져주신 언구(言句)를 일컫기도 합니다. 화두는 말 그대로 불조의 말의 뜻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화(看話)라고 합니다. 또 공안이라고도 하는데, 온 우주의 질서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상급기관에서 공문이 내려오면 일체를 똑같이 합니다. 그와 같이 질서를 지킨다는 뜻인데, 화두 타파가 되어야만 비로소 우주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분상에 든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본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도통(道通)입니다. 여러분의 본바탕 마음은 무아(無我)입니다. ‘나’라는 망상이 없어서 무아이고, 또 따로 나라고 할 것이 없어서 무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아(大我)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본마음자리는 온 우주를 다 집어삼키고 있으며 대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온 우주 자체가 나입니다. 그것이 실상(實相)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다겁생래(多劫生來) 익힌 습관 때문에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몸뚱이 하나만 뒤집어쓰고 그것이 나라고 믿고 삽니다. 번뇌 망상의 가장 으뜸이 바로 이 ‘나’라는 생각입니다. 전체가 나이기 때문에 따로 없는 나를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본심경계에는 나라는 번뇌가 없습니다.
‘이~뭐꼬’ 화두 안에 이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불교의 근본요체라고 할 수 있는 삼법인이 모두 이 알 수 없는 의심덩어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온 법계가 화두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해야만 그 뜻에 계합할 수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표현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데 어디에 집착을 하시겠습니까? 화두 안에는 이런 무상의 도리가 사무쳐 있습니다. 또한 무아의 도리도 사무쳐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거기에 나라는 망상이 어디에 붙겠습니까? 화두를 들면 무아가 그대로 살아서 드러납니다. 즉 화두를 들면 바로 무아입니다. 여기에서 무아라는 생각을 붙이면 바로 생명을 잃고 죽게 됩니다.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산 것은 알 수 없는 그 자리만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활구라고 합니다.
화두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의심’을 생각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내 생각으로 화두를 짓습니다. 화두는 본심을 바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의심’ 은 앞생각, 뒷생각이 딱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의심’인 것입니다. 앞생각, 뒷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일념’이라고 합니다. 정신이나 생각을 통일하는 일념이 아닙니다. ‘생각이 붙지 않도록 통일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화두선은 산수문제와 같이 풀어서 의심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정에 사무쳐 그 정에서 생활을 할 때 부처님의 뜻이 그대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한다는 것은 그 전에 꽉 막혀 있던 것이 그대로 통해버렸다는 뜻이지, 답을 찾아서 의심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두 타파를 했을 때 한 공안을 통과해도 다른 공안에 막히는 것은 확연하게 공안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확연하게 공안을 통과하면 일체 공안에 막힘이 없이 되는데, 확연치 못하게 통과하면 몇 개의 공안에 막히게 됩니다.
어떤 알음알이도 붙지 않는 순수한 화두정에 들기 전에는 경전의 뜻을 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정이라야 참다운 힘이 납니다.
화두정이 무르익으면 참다운 지혜로 부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정은 정정(正定)으로서 정(定) 가운데에서도 바른 정이 됩니다.
화두정에서 살림이 되어야만 막혔던 것이 바로 통하게 됩니다. 화두를 한다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또는 꿈속에서나 깊은 잠 속에서도 항상 그 정에 있어야 합니다. 그 정 안에서 살림을 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반 대중의 분상에서는 엄청나게 밀밀(密密)한 것 같지만 부처님의 분상에서 보면 드문드문하게 뛰되 항상 자기 본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의 깨달으신 후 일거일동 행동한 것이 그대로 선(禪)입니다. 그래서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고 합니다.
화두정에 들면 일체 만물과 온 우주가 나와 다름이 없는 경지, 나와 둘이 아닌 경지가 됩니다. 일체의 추번뇌, 세번뇌가 모두 쉬는 것입니다. 고조사 스님들이 설하신 화두를 들면 이렇게 번뇌가 완전히 쉬어 방하착이 됩니다.
방하착하라! 놓아버린다는 생각까지도 다 놓아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방하착하겠습니까? 그 스님의 뜻만 바로 추구해 들어가면 바로 방하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을 하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지며 불견 법견에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새벽 축원문에 ‘필경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필경에 가서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경지를 깨닫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화두를 들면 바로 의단이 나타나서 번뇌 망상을 떨구고 가야 하는데, 화두를 든답시고 앉아서 도리어 생각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 뭐꼬‘는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구(句)입니다. 그래서 ’이~’ 하면 본심이 나타납니다. 이때 안으로 비추어보면 자신이 본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의심만 뒷받침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전후 망상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이~‘하고 생각을 일으키는 그놈이 무엇인지, 그 주인에 대해 회광반조 하라고 일러주건만 그 마음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기운이 발동해서 가라앉지 않고 화두가 잡히지 않으면 스스로 경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옛 스님들이 말씀하신 미친 기운이로수나. 이것을 잘 다스려야겠구나.‘
이렇게 다독거려 자꾸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면 선병이 되는데 공부하다가 자기 망상에 팔려서 엉 구렁텅이에 빠진 격인 선병은 치유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꾸 돌이켜보고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망상이 바글거리다가도 ’이뭐꼬?‘ 언구만 바로 지어 들어가면 망상이 탁 무너져버립니다. 일체 망상이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 공안을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뭐꼬‘이렇게 길게 할 것도 없습니다. ’이~‘하면 벌써 본심이 드러납니다.
무자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자화두를 하는 사람들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면 ’무~‘그러면 됩니다. 조주스님의 ’무‘라고 한 의지(意志)를 바로 찾으면 됩니다. 선사스님의 깨달은 경지, 즉 일체 번뇌가 붙지 않는 그 경지를 간파해내라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조심해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방편으로 말씀하셨고, 조주스님은 직설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 ’생각을 일으키지 이전‘을 찾으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을 일으키는 주인‘에 대해서 관하라 했지 아무것도 없는 ’생각 이전‘을 뒤적거리라는 말을 역대 조사들께서는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없는 구석을 뒤적거리다 보면 ’낙공외도‘가 됩니다. 그렇게 해도 나름대로 정력(定力)이 생기기 때문에 힘이 나오고 신통력, 즉 요술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착각을 일으켜서 도통했다고 하면서 인과(因果)도 무시합니다. ’무기공 외도‘는 당나귀 꾀가 나서 화두를 들지 않고 고요함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식이 맑다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유리집에 살면서 유리벽을 자꾸 닦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집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때가 끼고 또 때가 끼고, 또 때가 끼어서 한도 끝도 없이 닦아야 합니다. 하지만 화두 관법은 그 유리집을 깨고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한한 허공 전체가 집이 됩니다. 허공에 어떻게 때가 끼겠습니까?
신묘장구대다리니를 하거나 금강경을 읽으면 화두를 도와주는 조도품(助道品)이 됩니다. 화두가 좀 잡히는 것 같으면 차차로 이런 방편은 떨구어야 합니다. 화두가 잘 되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두를 잡기 위한 조도품으로 하는 것일 뿐, 이것 자체가 근본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기에 단전호흡이 좋다는 하니 이 애기를 잘못 받아들여 요즘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그냥 앉아서 단전호흡만 하고 있습니다. 또 화두를 단전호흡과 함께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냥 단전호흡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화두는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전호흡은 상기가 되었을 때 치유책으로 쓰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화두를 잡아 챙기면 됩니다. 단전호흡을 하는데 화두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괜찮지만 그 둘을 함께 한다고 애쓰다가는 자칫하면 두 가지 다 안 되고 소승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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