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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산무이선사의 선경어(禪警語)- 경허선사 선문촬요 중

선사선담

by 노하시원 2020. 4. 6. 19:30

본문

 

선 경 어(禪警語)

 

박산무이 선사의 말씀

 

공부(工夫, 參禪)를 하되 가장 먼저 생사심을 깨뜨려야 한다. 바깥 세계와 몸과 마음이 모두 거짓 인연이므로 그것을 실제로 주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만약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한다.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하면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생각 생각에 멈추지 않으니, 이것을 어떻게 따돌릴 수 있겠는가? 오직 이 한 생각만을 수단 방편으로 삼아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길을 찾듯이 하여야 한다. 한 걸음도 함부로 나아갈 수 없고, 한 걸음도 멈출 수 없으며,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당해서는 오직 사나운 불길도 돌아보지 말고, 목숨도 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지도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도 말고, 잠시 멈추려 하지도 말고 곧장 앞으로 내달아 뛰쳐나오는 길만이 묘수이다.

 

공부를 하되 의정을 일으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예컨대 우리가 태어났으되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니 그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그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사문제라는 관문을 뚫지 못하면 문득 의정이 생겨나서 눈꺼풀 위에 맺혀 있어서 놓으려야 놓을 수 없고 쫓으려야 쫓을 수 없다. 그러다가 홀연히 하루 아침에 의심덩어리를 두드려 깨뜨리고 나면 생사라는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

 

공부를 하되 무엇보다 고요한 경계에 맛들이는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고요한 경계는 자기로 모르는 사이에 말라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히게 만든다. 사람들은 대개 시끄러운 경계는 싫어하고, 고요한 경계는 싫증을 내지 않는다. 수행하는 사람이 내내 시끄러운 바닥에 있다가 한번 고요한 경계를 만나게 되면 마치 엿이나 꿀을 먹는 것과 같고, 마치 오랜 피로 끝에 단잠을 즐기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스스로 알 수 있으랴!

 

공부를 하되 마음을 바르고 굳세고 곧게 가져 인정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인정에 따라 어울리다 보면 공부가 향상되지 못한다. 공부가 향상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반드시 속된 중의 축에 휩쓸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공부하는 사람은 고개를 쳐들어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도 땅을 보지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을 모르며,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어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해야 한다. 온몸과 안팎이 오직 하나의 의심덩어리뿐이니, 의심덩어리를 깨뜨리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쉬지 말라. 이것이 공부하는 데에 가장 긴요한 것이다.

 

공부를 하되 죽고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살고 죽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결단코 의정과 함께 한 곳에 매어두기만 하면 시끄러운 경계는 굳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버려지고, 허망한 마음을 굳이 맑히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게 된다. 육근의 문턱이 자연히 텅 비고 넓어져 손짓하면 곧 오고, 부르면 곧 대꾸하거늘 어찌 살지 못할까 걱정하랴!

 

공부를 하되 화두를 들 때에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적군의 목을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귀신의 굴 속에 앉아 멍청하게 한평생을 보내고 말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랴!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두 눈을 딱 부릅뜨고 네 다리를 떡 버티고 다만 쥐를 잡아 입에 넣고야 만다. 설사 닭이나 개가 곁에 있더라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다만 분연히 이 이치를 밝혀야 한다. 설사 팔풍경계가 눈앞에 엇갈리더라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자칫 딴생각이 일어나면 쥐는커녕 고양이마저 달아나 버릴 것이다.

 

공부를 하되 옛 스님들의 공안을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설사 낱낱이 풀이하여 이해한다고 하여도 자기 공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사람은 옛 스님들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와 같음을 알지 못한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어떻게 그 속에서 앉고 눕고 하겠는가? 더구나 그 속에서 크다 작다 분별하고, 위다 아래다 따진다면 목숨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을 것이다.

 

공부를 하되 문구나 찾아 쫓으려 하지 말고, 언어나 기억하려 하지 말라. 아무 이익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하여 버릴 것이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를 바란들 되겠는가?

 

공부를 하되 무엇보다 견주어 헤아리는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려 하면 도와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니,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만약 의정이 문득 일어난 사람이라면 마치 철벽이나 은산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과 같아서 살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만약 살길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안온하게 지낼 수 있으랴! 다만 이와 같이 해나가면 시절이 도래하여 저절로 끝장을 내게 될 것이다.

 

황벽선사가 이르기를 진로(塵勞,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니, 고삐를 꼭 잡고 한바탕 달려라. 한 차례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 향기가 코를 찌르랴!”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가장 친절한 말씀이니, 이 게송으로써 때때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공부가 저절로 향상될 것이다.

 

공부를 하되 가장 긴요한 것은 간절 절()자이니, 절자가 가장 힘이 있다.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이 생기면 방종하여 못 할 짓이 없게 된다. 마음가짐이 참으로 간절하다면 방종과 게으름이 어찌 생겨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간절 절자 하나면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간절 절()자 하나면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無記)의 삼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 마음가짐이 아주 간절하면 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요, 마음가짐이 아주 간절하면 악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마음가짐이 아주 간절하면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두가 간절하면 도거(掉擧, 산란)도 없을 것이며,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도 없을 것이다.

 

간절 절()자 하나가 가장 간절한 말이니, 마음가짐이 간절하면 틈이 없으므로 마장이 끼여들지 못하고, 마음가짐이 간절하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따위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외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공부를 하되 무엇보다 생각을 기울여 시나 게송이나 글 따위를 짓는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시나 게송으로 일가를 이루면 시승이라 불리고, 글을 잘하면 문자승이라 불리게 되는데, 이것은 참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무릇 나쁜 경계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 즉시로 알아차려 깨뜨리고, 화두를 들어 경계의 반연을 따라 굴러가지 말아야 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바짝 조여댈 것 없다고 하나, 이 말이 가장 사람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니, 학인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하되 미혹한 채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갈 때 갈 위에 멈추어 있으면서 집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면 끝내 집에 도달할 수 없고, 반드시 걸어가야 집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미혹한 채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깨달을 수 없나니, 반드시 애써서 부딪혀 깨달아야 할 것이지 깨달아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공부를 하되 실 한 올, 털 한 끝만큼의 딴생각도 내지 말아야 한다. 가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외곬으로 본래부터 참구하던 화두를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해답을 찾으려 하여야 한다. 만약 실 한 올, 털 한 끝만큼이라도 딴 생각을 내면 옛 사람이 말한 잡된 독이 심장에 들어가니 지혜의 생명이 위태롭다라고 한 격이니, 학인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말한 딴생각이라 함은 세간법뿐만 아니니, 마음을 찾는 일을 내놓고는 불법 안의 어떤 좋은 일일지라도 몽땅 딴생각이라 부른다. 어찌 불법 안의 일뿐이랴! 마음 바탕 위에서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교화하거나 하는 일이 몽땅 딴생각이다.

 

공부를 하되 더 이상 마음 쓸 곳이 없는 경지와 만 길 낭떠러지와 같은 경지, 물도 다하고 산도 다한 경지, 초승달 그림자가 물소뿔에 새겨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저절로 끝장을 내개 될 것이다.

 

공부를 하되 무엇보다 영리한 마음 하나를 두려워해야 한다. 영리한 마음은 상극인 음식과 같아서 어찌하다 한 번 먹었다 하면 아무리 좋은 약이 나타나더라도 구제할 수 없게 된다. 진정으로 참선하는 사람이라면 눈은 소경 같고 귀는 귀머거리 같아야 한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마치 은산이나 철벽에 부딪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렇게 하여야 비로소 공부가 상응하게 될 것이다.

 

공부를 하되 시끄러운 곳을 피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서 눈을 감고 귀신의 굴 속에 앉아 살길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말한 흑산 밑에 앉으니 사수(死水)가 스며든다.”는 격이니, 무슨 일을 이루랴! 다만 경계와 반연 속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는 곳이다. 화두 한 구절을 문득 일으켜서 눈썹 위에 두어, 가거나 앉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손님을 맞이하거나 배웅하거나 간에 오직 화두 한 구절의 해답만을 밝혀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이 원래부터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공부를 하되 향상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향상되지 않으면 향상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 향상되지 않는다고 곧장 퇴각하는 북을 친다면 설사 백겁이나 천생을 지낸들 어찌할 수 있으랴! 의정이 막 일어나서 놓아 버리려야 놓아 버릴 수 없을 때가 바로 향상하는 길이다. 이때에는 생사라는 두 글자를 가져 이마 위에 붙여 두어야 한다. 마치 사나운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어서 곧장 내달아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 격이니, 어찌 어정거릴 수 있으랴!

 

공부를 하되 다만 하나의 공안에만 마음을 쏟아야지 모든 공안에 알음알이를 지어서는 안 된다. 설사 풀이하여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지식일 뿐 깨달음은 아니다. 법화경에 이르기를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고 하였으며, 원각경에 이르기를 생각으로 여래의 원만하게 깨달은 경지를 헤아리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서 끝내 이룰 수 없다고 하였으며, 동산스님이 이르기를 마음과 의식으로써 현묘한 종지를 배우려 한다면 이는 서쪽으로 가려 하면서 동쪽으로 향하여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공안을 파고드는 사람들은 살갗 아래 핏줄이 있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

 

도는 잠시라고 여읠 수 없는 것이니, 여읠 수 있는 것이라면 도가 아니다. 공부는 잠시라도 끊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 끊어진다면 공부가 아니다. 진정으로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공부해야 하거늘 어느 겨를에 딴 일에 마음을 쓰겠는가? 옛 스님이 이르기를 한 사람이 만 명의 적국과 싸울 경우, 어찌 얼굴을 마주하여 눈알을 깜박일 틈이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이 공부를 하는 데 가장 요긴한 말이니 몰라서는 안 된다.

 

공부를 하되 새벽이나 밤이나 감히 게을러서는 안 된다. 자명스님은 밤에 졸음이 쏟아지면 송곳으로 살갗을 찌르면서 옛사람은 도를 위해서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어찌된 사람인가?”라고 말씀하다 한다.

 

공부를 하되 의식 속에서 헤아리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헤아리고 생각하는 일은 공부를 조금도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사유복탁(思惟卜度, 알음알이)이라는 네 글자는 바른 믿음에 장애가 되고, 바른 수행에 장애가 되며, 아울러 도안에 장애가 되는 것이니, 학인들은 그것을 태어날 때부터의 원수 집안처럼 대해야만 한다.

 

공부를 하되 거량하는 곳을 향하여 지레 짐작하지 말아야 한다. 지레 짐작하면 진짜 멍텅구리이니, 참구하는 일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모름지기 의정을 일으켜서 철저하게 지레 짐작할 곳도 없고, 또한 지레 짐작할 것도 없게끔 하여야 한다. 마치 허공 중의 누각이 사방팔방으로 다 뚫린 것과 같아서 걸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둑을 잘못 알고 제 자식으로 여기며, 종을 잘못 알고 상전으로 여기는 꼴이 된다. 옛 스님이 이르기를 당나귀의 안장을 보고 아버지의 턱뼈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씀이다.

 

공부를 하되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파하여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남의 것일 뿐,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을 때에 길만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장안의 소식까지 물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장안의 소식을 낱낱이 설명하여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그가 본 것일 뿐, 길을 물은 사람이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와 같다.

 

공부를 하되 공안을 염송만 해서는 안 된다. 염송하여 오고 염송하여 간들 공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염송하더라도 공부와는 아무런 상관없다.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이익이나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염불을 굳이 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낱낱이 화두를 드는 데도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무자 화두를 든다면 무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든다면 백수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일귀하처 화두를 든다면 일귀하처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일단 의정이 일어나면 온 누리가 하나의 의심덩어리가 되어 부모에게 물려받은 이 몸과 온 누리가 있는 줄도 모르며, 안팎할 것이 없이 온통 한 덩어리가 되어서는 어느 날 대나무 테를 맨 물통이 저절로 터지듯이 의심덩어리가 풀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 선지식을 다시 만나면 입을 열기도 전에 일대사를 끝마치게 될 것이다.

 

공부를 하되 잠시라도 바른 생각(화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고 한 생각을 참구한다면 반드시 이단에 빠져 헤매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좌하여 오직 말고 고요함만을 좋아하며 순수하고 청정하고 티끌이 끊어진 것으로써 불사(佛事)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버렸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맑고 고요한 데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강의하고 담론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을 잘못 알아 불사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버렸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식신(識神, 영혼)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내리눌러서 망령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써 불사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버렸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돌로 물을 눌러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파초 잎을 벗겨 내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여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를 담벼락과 같이 한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버렸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허무()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령이 흩어지지 않은 시체이기 때문이다.

 

통틀어 말한다면 모두가 바른 생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되 일단 의정이 일어나면 다시 그 의정을 깨뜨려야한다. 깨뜨려지지 않을 때에는 마땅히 바른 생각을 굳건히 지니고 큰 용맹심을 일으켜서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해야만 된다. 경산스님이 이르기를 대장부가 결단코 이 일대사인연을 끝장내려 한다면 한꺼번에 안면을 바꾸고 서둘러 등마루를 곧추세우고는 인정을 돌아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하던 것을 붙잡아 이마 위에 딱 붙여 놓아라. 항상 남의 돈 백만 관을 빚진 사람이 빚쟁이에게 쫓기되 갚을 길은 없고 남에게 창피당할 일은 두렵고 하여 서둘 일도 없는데 서두르고, 바쁠 것도 없는데 바빠하고, 큰일도 없는데 큰일이라도 난 듯이 하여야 비로소 공부를 해나갈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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