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년 1월 13일 순례 1일째 - 델리국립박물관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2016년 1월 12일 인도 도착. 호텔 투숙 후 아침 일찍 델리 국립박물관에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였습니다. 부처님 다비식 이후에 유족측 및 여러 국가에서 부처님 사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다투다가 나중에 이를 공평하게 8개로 나누어서 가지고 가서 각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부처님 사후 불교문화를 집대성한 아소카대왕이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 된 곳 중 7곳을 찾아 내어 파헤쳐서 사리를 수거하여 다시 이를 나누어서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성터 피브와하라에 봉안된 사리만은 거기에 사는 용왕이 자신이 아소카대왕보다 더 잘 모실 수 있다고 반대하여 결국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되었는데 이후에 프랑스의 발굴자가 역사적인 고증을 토대로 그 자리를 찾아내어 22개가 든 사리함을 발굴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 3개는 태국과 싱가포르에 주고 나머지 19개를 현재 델리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견 없이 역사적으로 확증이 된 유일한 진신사리라고 합니다.
친견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구슬이 아니라 뼈조각이었습니다. 19조각이 소장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태국왕실에서 기증한 금탑 중앙부에 있는 아크릴 통에 담겨 있습니다. 각자 사리를 만들 일에 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하고 나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인간이었고 신이기도 우주이기도 한 부처님의 존재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애비색이 아니라 산주라는 가이드가 동행하였는데 가이드 산주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여 설명을 하지 못 하였는데, 마침 옆에서 순례를 마치고 진신사리 앞에서 예불 중이시던 비구니 스님의 도움을 받아 그 분께 부처님 사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석가모니불 정근 후에 5분간 참선하였습니다. 그 비구니스님은 신도 2명과 배낭여행을 몇 달 하면서 그 동안 이 진신사리 친견에 원을 세우고 왔고 그 날이 그 원이 이루어지는 날이자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매우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저희 순례단의 첫날 첫일정이 진신사리 친견이라고 하니 매우 부러워 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순례단 모두 참선에 들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친견 시간이 너무 짧아 다음에 꼭 다시 와서 긴 시간을 보내자고 하였습니다. 델리박물관은 경비가 삼엄하여 일정 크기 이상의 가방을 소지할 수 없고 카메라 후레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인도에서 여자 출입구와 남자 출입구가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리친견 후 국내선을 타기 위하여 다시 델리공항으로 갔습니다. 점심으로 공항에서 한식도시락을 먹었는데 바닥에 앉아서 먹어도 도시락이 너무 맛있어서 다들 웃음꽃이 만발하였습니다. 델리에서 보드가야로 가서 기내에 30분 정도 머물다가 바라나시로 갔습니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짐을 풀고 바로 갠지스 강가 가트라고 부르는 계단에서 하는 힌두교 불의 제사 의식인 아르띠뿌자 관람에 나섰습니다. 전용버스를 타고 가다가 카트 근처에서 내려 인력거에 해당하는 자전거 릭사로 갈아탔는데 마른 체격의 초로의 어르신이 아주 즐겁게 운전을 하시고 저희들은 무서워서 고함을 지르면서 갠지스강가 주변의 시장거리를 통과하였습니다. 릭사에서 내려서 다시 걸어가는데 거지, 병자, 아이들 모두 구걸을 하고 물건을 파는 통에 마치 지옥을 지나가는 듯하였습니다. 아르띠뿌짜 축제는 젊은 힌두교의 바라문 승려들이 가트마다 서서 불을 사르고 향을 뿌리면서 주문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1분만 신기하고 나머지는 사람을 현혹하는 의식이라는 점이 명백하여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관람하는 사이에도 수없이 아이들이 오가면서 원달라를 외쳤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와 잤습니다.
2. 2016년 1월 14일 순례 2일째 - 갠지스강가 화장터 방문, 사르나트 녹야원 방문, 보드가야로 이동
일출 전에 일어나서 갠지스강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갠지스 강가의 일출과 인도사람들의 삶을 구경하였습니다. 일출이 시작되었고 배가 화장터에 이르러 높게 쌓인 장작을 보았고 그 앞에 마침 화장 준비 중인 가족을 보았습니다. 장작의 값이 바싸서 부자는 장작을 많이 사서 화장을 하면 몸을 다 태울 수 있지만 가난한 자는 장작값이 없어서 조금 태우다가 바로 갠지스강으로 버려진다고 하였습니다. 화장터 앞에서 스님께서 망자의 명복을 빌며 간단하게 예불을 하셨습니다. 갠지스강가는 인도사람들의 삶, 생로병사가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순례단은 각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화장터 앞에서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침 갠지스 강가에는 목욕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서 여기가 바로 인도인들의 삶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호텔에 왔다가 다시 바르나시 근처 3시간 거리에 있는 사르나트 녹야원으로 갔습니다. 사르나트 녹야원은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성도한 후에 성도 전에 자신을 따랐던 5명의 수행자가 머물고 있던 이 곳 녹야원으로 와서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을 한 곳입니다. 녹야원이란 사슴들이 놀고 있는 동산이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이 곳에 사슴이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초전법륜지를 기념하여 아소카대왕이 아소카석주를 세웠고 부처님의 8대 성지를 그린 석판, 초전법륜을 하는 부처님의 좌상, 석탑 등을 세웠습니다. 아소카대왕의 유물은 녹야원 옆 사르나트 박물관에 소장이 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내 아소카왕의 석주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동서남북으로 입을 크게 벌려 부처님의 법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형상화 했고, 그 아래 부처님의 상징인 사자, 태몽인 코끼리, 부처님이 물소띠여서 소, 부처님이 출가할 때 탄 말이 법륜과 함께 조각 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의 상징으로 엎어진 연꽃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기둥에 법륜을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아소카대왕은 가장 강성했던 마가다국의 왕으로 부처님과 37년 교류했던 빔비사라왕의 손자입니다. 영토 정복전쟁 후 공허함을 느끼다가 불교에 귀의한 후 흩어진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고 성지마다 탑을 세우고 석주를 세웠습니다. 아소카대왕의 석주는 그 곳이 부처님의 성지라는 인증표입니다. 아소카대왕은 부처님 당시의 유적을 찾아 빨간 벽돌로 유적을 다시 짓고 사암으로 석주를 세웠습니다. 이후 순례단이 가는 곳에는 거의 아소카대왕의 손길이 거쳐간 곳이었습니다. 아소카대왕이 일으킨 불교문화는 기원전부터 기원후 12세기 정도까지 수세기에 걸쳐 강성하였으나 외부에서 들어 온 이슬람교도들이 300년에 걸쳐 이를 파괴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도록 흙으로 파묻어서 아직도 발굴 중인 곳이 많습니다.
사르나트 녹야원에는 이후에 승원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여기에 온 삼장법사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승원에는 1500명의 승려들이 학문에 힘쓰고 있고 아소카왕이 세운 돌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발굴이 된 사르나트 녹야원에는 아소카대왕이 세운 탑이 있고 승원 유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소카대왕은 탑을 세우면서 그 아래에 스와스티카(만자 卍)를 그리고 탑을 세웠는데 가이드 애비색의 말에 의하면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이렇게 사람들을 앉혀 놓고 설법을 하셨고 우리 몸의 7개의 기문인 챠크라가 열릴 때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열린다고 하네요. 7개의 기문이 완전히 열려야 득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소카대왕이 세운 탑에도 이 만자가 문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탑돌이도 만자모양으로 시계방향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 애비색은 '옴'자에 관하여 부처님이 성도하면서 우주만물이 양자 중성자 전자로 구성이 된 것을 보고 옴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진언을 처음 시작할 때 하는 옴자는 우주의 기운을 몸으로 불러들이는 기운이 있는 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도를 하면서 태양계가 무량수억개가 있다고 하셨고 만물의 구성도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모두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자들이 너도나도 불교를 연구하고 불교신자가 된다고 합니다.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불교신자였다고 합니다.
아소카대왕의 탑 아래에서 잠시 예불을 올리고 참선에 들었습니다. 역시나 부처님의 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르나트 참배 후에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 비행기로 40분 정도인 거리가 버스로 약 6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3. 2016년 1월 15일 순례 3일째 - 보드가야 대각성지, 마하보디 대탑, 보리수, 죽림정사, 영축산, 나란다 대학 순례
전날 밤 늦게 보드가야에 도착하여 아침 일찍 보드가야 대각성지로 갔습니다. 연꽃을 사들고 부처님에 공양할 사리도 준비해서 갔습니다. 인도 성지의 대부분은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대각성지에서도 신발을 벗고 남녀를 나누어서 삼엄한 검색을 통과하여 들어갔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각국에서 모여든 승려와 신자들로 가득하였습니다. 아쇼카대왕이 지은 대승가람이 있고 마하보디탑이 있으며 그 안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법성선원에서 준비한 가사를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각자는 1초 정도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이상의 시간은 사람이 너무 많아 할 수 없어 서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탑 뒤에는 부처님이 성도한 보리수나무가 있었고 금강계단이 조성이 되어 있었는데 그 마저도 행사 중이어서 금강계단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참선을 하였습니다. 보리수나무는 원래 팝필라나무인데 부처님의 성도 후 보리수로 불리고 있습니다. 24시간 산소를 내뿜어서 참선하기 좋은 나무라고 합니다.
이후에 애비색을 따라 부처님이 7일씩 7주간 일곱 번 자리를 옮긴 곳을 따라 가며 참배를 하였습니다. 거기에도 아소카대왕의 석주가 있었습니다. 5주째에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그 곳 연못의 무칠란다 용왕이 나타나 부처님을 칭칭 감아 비바람을 막아 주었는데 용왕의 모습은 코브라의 모습이었습니다. 현재 보드가야 대각성지 연못에는 당시를 표현한 조각이 있습니다. 순례단은 가이드 애비색의 정성어린 배려로 부처님께서 7번째 옮긴 자리 옆에서 예불을 드릴 수 있었고 참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아소카 석주가 세워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도 후 7주째를 맞이하였을 때 이곳을 지나던 상인 두 사람이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은 고마움에 자신의 머리와 손톱을 주었습니다. 상인들은 부처님의 머리와 손톱을 가지고 가서 안장하였다고 하는데 사후에 생긴 사리 외에 부처님의 살아생전의 부처님의 신체일부를 가진 것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후에 재가신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드가야 성지는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인터넷에서 사진을 퍼왔습니다.
이후에 라즈기르의 죽림정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죽림정사는 불교 최초의 정사로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인 비구들을 위하여 바친 곳입니다. 부처님 시대의 사찰은 현재 우리나라처럼 화려한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냥 공원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후에 아소카대왕이 이곳에 건물을 세워 현재의 유적지가 된 것입니다. 죽림정사는 대나무가 많아 죽림정사라고 하는데 인도의 대나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무리를 지어 모여서 나기 때문에 마치 우산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 아래에서 수행을 하기 좋습니다. 죽림정사 내에는 연못도 있었습니다. 죽림정사에서 사리불존자 목련존자 마하가섭이 모두 출가를 하였고 1250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출가를 하여 교단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죽림정사 후에는 빔비사라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빔비사라왕의 아들은 아수라의 운명이어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만 만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어머니가 매일 접견시마다 몸에 밀가루와 우유를 바르고 가서 빔비사라왕을 먹여서 60일 정도를 살게 하였습니다. 아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뒤 후회를 하고 사형 명령을 거두었으나 이미 빔비사라왕은 열반한 뒤였습니다. 그 아들은 이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이 아들의 아들 즉 빔비사라왕의 손자가 바로 그 유명한, 아소카석주를 세운 아소카대왕입니다. 감옥터유적에는 감옥의 테두리 벽만 남아 있고 가운데가 방이 있었던 자리처럼 조금 움푹 패어 있었습니다.
빔비사라왕 감옥터 순례 후에 영축산에 올랐습니다. 영축산은 법화경의 무대로 사리불과 부처님의 명상지가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있을 때에도 자주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영축산은 등산을 해야 했는데 이번 순례 처음이자 마지막 등산이었습니다. 땡볕을 걸어도 기분만은 매우 상쾌하였습니다. 다만 옆에서는 샤캬무니불이라고 외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 엄마들, 병자들이 있고 보리수나무 열매로 만든 염주를 사라고 따라 붙는 상인들 덕에 모두 이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영축산 정상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내려오면서 조별 단체사진과 전체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영축산을 내려와서 중국의 현장, 우리나라 스님 혜초가 수학한 나란다대학으로 갔습니다. 나란다대학은 부처님 사후 최대의 불교대학으로 한 때 2만명의 승려들이 머물면서 불교를 공부한 곳입니다. 이후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나란다대학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모두 죽이고 흙으로 덮었는데 불태웠을 당시에 그 불길이 7일간이나 계속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란다대학 도서관에 소장하였던 불경 중 타고 남은 일부가 현재의 8만4천대장경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하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나란다대학의 규모는 사방 10킬로미터 규모였다고 하고 지금은 아주 일부만 발굴이 된 상태입니다. 나란다대학은 아소카대왕 당시의 유적형식으로 붉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애비색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한 스승이 한 제자를 기르고 그 제자가 스승이 열반하면 사리탑을 세우고 다시 자신의 제자를 받는 도제형식이었다고 합니다. 나란다대학에는 스승의 사리탑흔적이 많았습니다. 순례단은 나란다대학에 입학한 후 30분만에 졸업을 하고 졸업장으로 보리수나무잎을 받았습니다.
나란나대학을 나와 바이살리로 향하였습니다.
4. 2016년 1월 16일 순례4일째 - 바이살리 대림정사 순례, 열반 성지 쿠시나가르 대반열반사 순례. 룸비니 이동
전날 바이살리에 도착하여 잠을 청한 후 새벽에 바이살리의 대림정사로 향하였습니다. 여기는 부처님이 마지막 안거를 보낸 곳이고 열반을 예감하고 고향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고 아소카대왕이 세운 석주도 있었습니다. 여기의 석주는 북쪽을 향하고 있는 한 마리의 사자로 부처님이 열반을 준비하시고 북쪽으로 향하신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난다의 간청으로 이모인 마하 프라자파티의 출가를 허용하여 불교사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이곳 근처에 그 유명한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거사인 비말라키르티의 집터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으로 간다고 하고는 애비색이 사놓은 호텔예정지만 보았습니다.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바이살리에는 유마거사의 집터가 있는데 영험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유마거사의 집은 문수보살과 여러 보살이 문병을 오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한없이 넓어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열반성지 쿠시나가르로 갔습니다. 쿠시나가르 대반열반사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모습의 와상이 있는데 순례단은 여기에서 석가모니불을 외치면서 세 번을 돌고 두 장의 사리를 공양하였습니다. 이후 부처님의 다비를 한 다비장 등을 순례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를 본 날 부처님이 탄생하신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룸비니는 네팔에 있는데 인도와 네팔이 현재 정치적인 문제로 적대적이어서 국경을 통과하는데 한 시간이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 네팔은 아주 어두웠으나 인도보다는 공기가 맑았습니다.
5. 2016년 1월 17일 순례 5일째 - 룸비니 동산 무우수나무 아래 부처님 발자국 순례, 구룡못, 마야데비정사, 아소카 석주순례
네팔 룸비니 가든 호텔에서 1박 후 아침 일찍 일어나 룸비니동산으로 갔습니다. 룸비니에는 부처님이 태어나서 걸음을 걸으신 발자국과 무우수나무의 유적이 있었는데 그 곳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을 외치면서 세 번 돌면서 참배하였습니다. 유적지 내에서 예불을 올리면서 축원을 하시던 스님의 목소리가 급격히 떨리면서 순례단 모두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처님 탄생유적지를 나와 바로 옆 아홉 마리 용이 나와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구룡못을 구경하고 아소카석주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곳 아소카석주는 번개를 맞아 두 개로 부서졌는데 이후에 다시 이었다고 합니다. 이어진 자리가 선명하였습니다. 삼장법사 현장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석주가 부서졌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주 오래 전에 부서진 것 같았습니다. 아소카석주에는 아소카대왕이 이곳은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토지세를 감면한다는 비문이 있습니다. 아소카석주 아래에서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마칠 때쯤 또 순례단의 보살님들 몇 분이 울음을 터트렸고 다들 스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습니다.
룸비니유적지 내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찍지 못 하여 인터넷에서 사진을 퍼와서 올립니다.
룸비니를 뒤로 하고 부처님의 교화중심지 스라바스티로 이동하였습니다. 인도국경을 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네팔에서 다시 인도로 입국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미리 인도비자까지 만들어 왔습니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다시 인도로 들어왔고 스라바스티까지 6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6. 2016년 1월 18일 순례 6일째 - 기원정사 순례, 수닷타장자 집터, 앙굴리마라 집터, 부처님이 마야부인에게 설법을 하기 위하여 도리천으로 승천하신 곳 순례
스라바스티에서 자고 일찍 일어나 수닷타장자의 집터로 갔습니다. 수닷타장자는 코살라왕국의 부자로 마가다국에 무역을 하러갔다가 부처님을 뵙고 다음 안거지로 스라비스티로 오라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스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안거지를 찾다가 제타 태자의 정원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하고 태자에서 팔라고 하였더니 태자가 정원바닥 가득 금전을 깔라고 하였습니다. 수닷타장자가 진짜 전재산을 털어 정원바닥에 금전을 까는 것을 보고 태자도 감복하여 일부 땅은 자신이 기부를 하기로 하여 수닷타장자와 제타 태자가 공동으로 마련한 안거지가 기원정사입니다.
수닷타장자의 집 바로 옆에는 앙굴리마라의 집터가 있습니다. 앙굴리마라는 원래 스라바스티의 어느 바라문의 제자 아힘사라는 청년이었는데 바라문의 부인이 아힘사를 유혹하려다가 실패를 하자 바라문에게 아힘사가 자신을 범하려고 하였다고 거짓 고변을 하였습니다. 바라문은 원한을 품고 아힘사에게 108명을 죽여서 이들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면 성도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힘사는 그 때부터 칼을 들고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 목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이 때부터 앙굴리마라로 불렸는데 앙굴리는 손가락, 마라는 목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앙굴리마라가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자 앙굴리마라 옆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07명까지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기다리는데 마침 눈앞에 자신에게 밥을 주러 온 어머니가 보였는데 앙굴리마라가 어머니를 죽여서 성도를 하려던 찰나에 멀리서 부처님이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을 죽이러 갔는데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을 따라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앙굴리마라는 화가 나서 부처님에게 거기 섰거라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나는 아까부터 가만히 서 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니가 아니더냐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감복한 앙굴라마라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출가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기원정사에 있는 동안 앙굴라마라는 자신이 죽인 많은 가족들의 괴롭힘을 묵묵히 참으면서 부처님의 제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가는 길에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에게 설법을 하고자 도리천으로 올라가신 곳의 유적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발굴도 다 되지 않았고 윗부분만 보이고 모두 흙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신 직후에 부처님을 괴롭히던 부처님의 사촌이자 아난다의 형 데바닷타가 우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승천하신 곳 근처에 데바닷타가 떨어져 죽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도리천에 3일을 머무셨는데 이승에서는 3개월이 흘러서 그 동안 부처님을 보고 싶어서 부처님을 닮은 상을 만들어 모시기 시작한 것이 불상제작의 시초라고 합니다.
이후 기원정사로 갔습니다. 기원정사는 수닷타장자와 제타 태자가 부처님께 안거지로 만들어 바친 곳입니다. 수닷타장자는 고독한 이에게 공양을 많이 하여 한자로 급고독이라고 하고 제타 태자는 기타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기원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좋아하시던 망고나무도 많고 환경이 무척 좋아 부처님이 19안거를 여기서 보내시는 등 여기서 대부분의 안거를 보냅니다.
기원정사 내에서는 부처님의 처소가 있는데 애비색과 심성욱 본부장님의 비호 아래 순례단이 부처님의 처소를 순례단이 독점하고 예불을 올리고 참선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초가였던 곳을 아소카대왕이 벽돌로 멋지게 지어놓았습니다. 이곳도 이슬람교도들이 덮어 버려서 이직도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마침 저희가 갔을 때에는 누군가 부처님 처소에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장식해 놓아 향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곳의 기운도 여느 곳 못지않게 강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처소 앞에서 스님의 요청으로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부처님의 처소를 나와 부처님이 매일 21걸음을 옮기시면서 명상하시던 터, 아난다의 나무를 세번 돌았습니다.
아난다의 나무를 막 돌아섰을 때 스님께서 이곳은 부처님이 수행을 하던 곳이니 우리도 천천히 걸으면서 부처님이 우주와 내가 하나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깨어있으면서 내 걸음을 느끼면서 걸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기원정사를 나올 때까지 부처님처럼 걸으면서 잠시 참선에 들었습니다. 무주월보살님은 아예 부처님의 기를 느껴보신다고 하면서 기원정사 내에서는 맨발로 다니셨습니다.
기원정사 내에서는 부처님이 당시의 종교계급인 브라만과 논쟁을 벌인 연못도 있습니다. 브라만들은 크샤트리아 계급에 불과한 부처님이 성도를 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 떼거지로 찾아와 부처님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논쟁이라고는 해도 이들이 질문을 하였고 부처님은 대답만 하였는데 7일이 지나도록 논쟁이 계속이 되어도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부처님은 대답을 멈추고 뒤에 있는 연못 위를 걸으면서 경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연못 위를 걷는 부처님의 신통을 보고서야 이들이 감복하여 부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이들에게 보이신 것은 계급을 넘어 누구나 성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전이나 현재에도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있어 종교계급인 브라만, 정치를 담당하는 전사계급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노예계급인 수드라가 있고 이에도 속하지 못하는 최하층 불가촉천민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이드 애비색에 따르면, 처음에는 서로 전문분야를 나누어서 서로 불가침으로 영역을 정한 것이 차츰 계급으로 고착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의 대도시에는 영국식으로 살아서 계급제도가 사라졌지만 아직도 인도사람 대부분은 이 카스트제도의 뿌리 내에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는 이들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연의 의무인 스바다르마를 따르도록 하고 있는데 애비색에게 아직도 인도사람들이 스바다르마를 따르냐고 물어보니 인도인들은 태어나면서 그 본연의 의무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기원정사 주변에는 법성선원 순례단 외에 정토회 순례단도 있었습니다. 법륜스님과 정민스님의 출가 전 인연으로 두 분이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정토회는 바닥에 앉아 공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니 우리 순례단이 얼마나 편한 여행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기원정사 순례 후 럭나우로 이동하였습니다. 럭나우까지는 6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7. 2016년 1월 19일 순례 7일째 - 상카시아 순례, 아그라로 이동
럭나우 피카딜리 호텔에서 숙박하였습니다. 피카딜리호텔은 5성급 호텔로 아주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습니다. 1박 후 바로 상카시아로 갔습니다. 상카시아까지 4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가셔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제도하고 내려오신 곳입니다. 아직 발굴이 다 되지 않아 다른 유적에 비하여 초라하였습니다. 이곳 아소카 석주에는 코끼리 모양이 있고 코끼리 다리 사이에는 꿈의 계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 마야부인을 기리는 작은 탑 같은 정사가 있었고, 마야부인이 잡고 부처님을 낳은 무우수 나무가 있었습니다. 무우수 나무는 잔가지가 밧줄처럼 땅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잡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룸비니에서 마야부인이 이 가지를 산줄 삼아 잡았다고 합니다. 무우수 나무는 생명력이 강하여 이 나무 주위에는 풀조차 나지 않는다고 하고 죽으면 다시 가지가 나서 자라기 때문에 거의 불멸의 나무라고 합니다.
상카시아 순례 후 바로 아그라로 향했습니다. 상카시아가 사실상 성지순례 마지막 코스였습니다. 다음 코스는 아그라의 타지마할이었는데 이곳은 불교유적지가 아니라 이슬람교도가 세운 무굴제국의 왕이 부인을 위하여 세운 무덤이라 성지가 아니었습니다.
아그라로 가는 길 점심공양 이후부터는 인도요리사가 동행하지 않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에서 인도요리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아그라까지 다시 6시간 이상이 걸려서 이 날 하루는 무척 고된 하루였습니다.
8. 2016년 1월 20일 순례 8일째 - 타지마할 관람
타지마할은 인도 내 이슬람교 제국이었던 무굴제국의 샤자한 왕이 자신의 부인인 뭄 타지마할의 무덤으로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지진에 대비하여 침향나무를 대고 위에는 대리석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전체적으로 한 척의 배와 같은 형상이라고 합니다. 좌우대칭으로 7대 불가사이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얀 대리석에 루비, 에머럴드, 샤파이어로 상감기법 장식을 하였습니다. 타지마할 부인은 못생겼었는데 지극정성으로 샤자한을 모셔서 샤자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고 아이를 14명을 낳고 죽었다고 합니다. 죽으면서 다른 부인을 두지 말고 죽어서 자신의 옆에 묻히라고 했다고 하네요. 이쯤 되면 유언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까 합니다. 결국 샤자한은 막내딸과 함께 부인 옆에 묻히게 됩니다. 연 2만명의 사람들이 22년간 지었다고 하니 아무리 아름다워도 만리장성처럼 민초들의 눈물이 섞인 건물이라 고운 시선으로 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지마할 관람을 마치고 바로 델리공항으로 가서 일본항공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