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들라고 하면 '보는 놈' 이 있고 '보여지는 놈'이 있는 엉뚱한 관법을 하듯이 말에 가서 걸려 가지고 두 놈이 되어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내 생각 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승관법에 떨어지게 됩니다. 화두를 잘못하면 그렇게 되어버리기가 쉽습니다. 화두를 들면 바로 의단이 나타나서 번뇌 망상을 떨구고 가야 하는데, 화두를 든답시고 앉아서 도리어 생각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가 잡히지를 않습니다.
이근원통(耳根圓通) 관세음보살 관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세에 관세음보살께서 '듣는 자가 누구인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이근원통법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잘 하면 화두선이 되지만 잘못하면 관념선이 되어버립니다. 활구, 사구는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화두는 잘 하면 활구선이 되고, 조금 잘못하면 그대로 관념선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점들을 잘 알아서 지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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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뭐꼬?'는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구(句)입니다. 그래서 '이~'하면 본심이 나타납니다. 이때 안으로 비추어보면 자신이 본심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의심만 뒷받침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전후 망상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안으로 자꾸 비추어보면 자기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므로 의심이 따라붙어야 하는데, 도무지 의심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체하는 마음이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뭐꼬?'
"이~'하고 생각을 일으키는 그놈이 무엇인지, 그 주인에 대해 회광반조(回光反照)하라고 일러주건만 그 마음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기운이 발동해서 가라앉지 않고 화두가 잡히지 않으면 스스로 경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옛 스님들이 말씀하신 마친 기운이로구나. 이것을 잘 다스려야겠구나.'
이렇게 다독거려 자꾸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면 선병(禪病)이 되는데, 공부하다가 자기 망상에 팔려서 엉 구렁텅이에 빠진 격인 선병은 치유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꾸 돌이켜보고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망상이 바글거라다가도 '이 뭐꼬' 언구만 바로 지어 들어가면 망상이 탁 무너져버립니다. 일체 망상이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체 공안을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 뭐꼬' 이렇게 길게 할 것도 없습니다. '이~'하면 벌써 본심이 드러납니다.
무자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자화두를 하는 사람들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면 '무~'그러면 됩니다.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한 의지를 바로 찾으면 됩니다. 일체의 화두가 그렇습니다. 선사스님이 낸 그 뜻을 바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뜻'이라고 하니 오해하기 쉬운데, 무엇을 헤아려 짐작하는 그런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사 스님의 깨달은 경지, 즉 일체 번뇌가 붙지 않는 그 경지를 간파해내라는 말입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부처님은 준동함령도 불성이 있고, 개유불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조주 스님은 왜 없다고 했습니까?" 무자 화두를 이렇게 들면 어긋나기가 쉽습니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고, 조주스님은 없다고 했으니 화두를 한답시고 양쪽을 오가며 달립니다. 있다고 한 쪽으로 달렸다가, 없다고 한 쪽으로 달렸다가 종국에는 중간을 찾는 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그걸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대목에서 조심해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방편으로 말씀하셨고, 조주스님은 직설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본심자리를 그대로 드러낸 조주스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는데 부처님 말씀을 갖다 붙이면 방편과 직설을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헛힘만 쓰게 되고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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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교신문을 보니 화두를 참구할 때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을 찾으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을 일으키는 이 주인'에 대해서 관하라고 했지 아무것도 없는 '생각 이전'을 뒤적거리라는 말을 역대 조사들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없는 구석을 뒤적거리다 보면 '낙공 외도'가 됩니다. 그렇게 해도 나름대로 정력이 생기기 때문에 힘이 나오고 신통력, 즉 요술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착각을 일으켜서 도통했다고 하면서 인과도 무시합니다.
무기공외도는 당나귀 꾀가 나서 화두를 들지 않고 고요함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화두를 좀 들다 보면 거친 번뇌가 잠을 자서 편안해집니다. 그 경계에 집착해서 그걸 지키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화두가 어느 정도 길이 들면 화두 들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천 근 무게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들지 않고 꾀가 나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함이 없다고 하여 무기공 외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개구리나 구렁이가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은 정(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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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잡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해서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 경계에 자꾸 머물러 있으면 식(識)이 점차로 맑아집니다. 식이 맑아지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여다보고 다음날 생길 일을 먼저 알게 되는데, 이런 공부 경계가 났을 때 선지식에게 길을 물어 정법으로 바르게 가지 않으면 귀신굴에 들어가기 딱 좋습니다.
식이 맑다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유리집에 살면서 유리벽을 자꾸 닦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집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지런히 닦지 않으면 때가 끼고 또 때가 끼고, 또 때가 끼어서 한도 끝도 없이 닦아야 합니다. 하지만 화두 관법은 그 유리집을 깨고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한한 허공 전체가 집이 됩니다. 허공에 어떻게 때가 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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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호흡이 상기증에 좋다는 얘기를 잘못 받아들여 요즘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그냥 앉아서 단전호흡만 하고 있습니다. 또 화두를 단전호흡과 함께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냥 단전호흡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화두는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전호흡은 생각이 자꾸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뻐근하니까 단전에 생각을 두어서 올라간 기운을 자꾸 내리는 것입니다. 상기되었을 때 치유책으로 쓰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화두를 잡아 챙기면 됩니다. 단전호흡을 하는데 화두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은 괜찮지만 그 둘을 함께 한다고 애쓰다가는 자칫하면 두 가지 다 안 되고 소승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선은 활발발하게 살아서 힘있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건혜(乾慧)를 가지고 이치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에 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몸을 받아 어렵게 부처님의 정법을 만났다면 그야말로 산 생명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알 수 없는 의정으로 자신을 살리고 일체중생을 살려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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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본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도통(道通)입니다. 여러분의 본바탕 마음은 무아입니다. 나라는 망상이 없어서 무아이고, 또 따로 나라고 할 것이 없어서 무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아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본마음 자리는 온 우주를 다 집어삼키고 있으며 대자유를 누리고 있는 있습니다. 온 우주 자체가 나입니다. 그것이 실상입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다겁생래 익힌 습관때문에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몸뚱이 하나만 뒤집어쓰고 그것이 나라고 믿고 삽니다. 번뇌 망상의 가장 으뜸이 바로 나라는 생각입니다. 전체가 나이기 때문에 따로 없는 나를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본심 경계에는 나라는 번뇌가 없습니다.
'이~뭐꼬' 화두 안에 이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불교의 근본요체라고 할 수 있는 삼법인이 모두 이 알 수 없는 의심 덩어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온 법계가 화두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해야만 그 뜻에 계합할 수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표현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데 어디에 집착을 하시겠습니까? 화두 안에 이런 무상의 도리가 사무쳐 있습니다.
또한 무아의 도리도 사무쳐있습니다. 알 수 없는 거기에 나라는 망상이 어디에 붙겠습니까? 화두를 들면 무아가 그대로 살아서 드러납니다. 즉 화두를 들면 바로 무아입니다. 여기에서 무아라는 생각을 붙이면 바로 생명을 잃고 죽게 됩니다.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산 것은 알 수 없는 그 자리만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활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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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의심'을 생각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내 생각으로 화두를 짓습니다. 화두는 본심을 바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의심'은 앞생각,뒷생각이 딱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 놓은 것이 '의심'인 것입니다. 앞 생각, 뒷 생각이 끊어져서 무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일념'이라고 합니다. 정신이나 생각을 통일하는 일념이 아닙니다. '생각이 붙지 않도록 통일하는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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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은 산수문제와 같이 풀어서 의심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정에 사무쳐 그 정에서 생활을 할 때 부처님의 뜻이 그대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한다는 것은 그 전에 꽉 막혀 있던 것이 그대로 통해버렸다는 뜻이지, 답을 찾아서 의심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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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정에서 살림이 되어야만 막혔던 것이 바로 통하게 됩니다. 화두를 한다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또는 꿈 속에서나 깊은 잠에서도 항상 그 정에 있어야 합니다. 그 정 안에서 살림을 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반 대중의 분상에서는 엄청나게 밀밀한 것 같지만 부처님 분상에서 보면 드문드문하게 뛰되 항상 자기 본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자기 본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도통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에 일체 번뇌가 없는 자리에서 사셨습니다. 그 경지가 바로 평상심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일거일동 행동한 것이 그대로 선입니다. 그래서 선시불심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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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정에 들면 일체 만물과 온 우주가 나와 다름이 없는 경지, 나와 둘이 아닌 경지가 됩니다. 일체의 추번뇌 세번뇌가 모두 쉬는 것입니다. 고조사 스님들이 설하신 화두를 들면 이렇게 번뇌가 완전히 쉬어 방하착이 됩니다.
'방하착하라!'
놓아버린다는 생각까지도 다 놓아 버렸는데 과연 무엇을 방하착하겠습니까? 그 스님의 뜻만 바로 추구해 들어가면 바로 방하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을 하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지며, 불견, 법견에도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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