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
머리 숙여 합장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 예를 올립니다. 제자가 지금 이 논을 지었으나 성인의 마음을 알지 못했을까 두려워 참회를 드리오니 받아주십시오. 만약 제가 성인의 이치를 알았다면 유정 무정의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여 베풀게 해주십시오. 원컨대 내세에 모두 성불하게 해주십시오.
1. 선정으로 돈오하다.
문: 어떤 법을 닦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오직 돈오(頓悟) 일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곧 해탈을 얻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돈오(頓悟)입니까?"
답: 돈(頓)이라는 것은 몰록 망념(妄念)을 없애는 것이고, 오(悟)라는 것은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을 깨닫는 것이다.
문: 무엇을 쫓아서 닦습니까?
답: 근본(根本)을 쫓아서 닦아라.
문: 어떻게 근본을 쫓아서 닦습니까?
답: 마음이 근본이니라.
문: 그러면 마음이 근본인지 어떻게 압니까?
답: [능가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생하면 만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만가지 법이 다 사라진다'고 하였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淨土)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게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 불토가 깨끗하다' 하였다.
[유교경]에 이르되 '다만 마음을 한 곳으로 잘 단속하면 판단하지 못할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경에 이르되 '성인은 마음을 구하지 부처를 구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지 마음을 구하지 않는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지 몸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다스리지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명경]에 이르되 '죄는 마음을 쫓아서 일어나고 다시 마음을 좇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런 고로 선악 일체가 모두 마음을 쫓아 일어나는 줄을 알아라. 그러므로 마음이 근본이 됨이 만약 해탈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라. 만약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공연히 수고로움만 허비하게 된다. 바깥 모양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옳지 못하다.
[선문경]에 이르되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록 수천 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능히 이루지 못하리라. 안으로 관조해서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한 생각 찰나에 바로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였다.
문: 근본을 닦는다 하니 어떤 법으로 닦습니까?
답: 오직 좌선하여 선정을 이루어야 곧 얻는다.
[선문경]에 이르되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를 구한다면 선정을 요한다. 만약 선정이 없으면 생각이 시끄럽게 움직여서 선을 무너뜨린다.' 고 하였다.
문: 어떤 것을 선(禪)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定)이라 합니까?
답: 망념(妄念)이 나지 않음을 선(禪)이라 하고, 앉아서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 정(定)이 한다. 본성이란 너의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이니, 정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 경계를 대해서 마음이 없으므로 팔풍(八風)에도 능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익과 손해, 헐뜯음과 높임, 칭찬과 비방, 괴로움과 즐거움을 이름하여 팔풍이라 한다.
만약 정(定)을 얻은 자가 비록 범부일지라도 바로 부처님의 자리에 들어간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되 '중생이 부처님의 계(佛戒)를 받으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자리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것을 얻은 자를 즉 해탈했다고 이름하고, 또한 피안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육도(六度)를 뛰어나고 삼계(三界)를 뛰어넘은 대력보살(大力菩薩)이며 무량한 힘을 가진 존귀한 분이니(無量力尊) 이가 곧 대장부(大丈夫)인 이니라.‘고 하였다.
2. 본래 마음
문: 마음은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합니까?
답: 머무르되 머무르는 곳이 없는 데에 곧 머문다.
문: 머무르되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답: 일체처(一切處)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곧 머무르는 곳 없이 머무는 것이다.
문: 어떠한 것을 일체처(一切處)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 합니까?
답: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선과 악, 있음과 없음, 안과 밖과 중간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공(空)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空)이 아닌 데에도 머무르지 않고, 정(定)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정이 아닌 데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이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곧 머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얻은 자를 일컬어 무주심(無住心) 이라 한다. 무주심이 곧 불심이다.
문: 그 마음은 어떤 물건과 같습니까?"
답: 그 마음은 푸른 것도 아니요 누런 것도 아니며, 붉은 것도 아니요 흰 것도 아니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가는 것도 아니요 오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요 깨끗한 것도 아니다.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다.
담연상적(湛然常寂)하다. 이것이 본래 마음의 형상이니라.
또한 이것이 본래 몸이며 본래 몸이 곧 부처님 몸이니라.
3. 평상심이도
문: 몸과 마음은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이 눈으로 보고, 귀로 보고, 코로 보며, 마음 등이 보는 것입니까?
답: 그러한 갖가지로 보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없다.
문: 이미 갖가지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습니까?
답: 이 자성(自性)으로 보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자성은 본래 청정하여 담연공적하다. 공적한 몸(體) 가운데에서는 능히 이 보는 것을 내느니라.
문: 다만 청정한 몸(體)을 얻을 수가 없는데, 본다는 것은 무엇을 쫓아서 있습니까?
답: 비유컨대 밝은 거울과 같은 것이니라.
거울 가운데에는 비록 모양이 없되 능히 일체상(一切像)을 보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밝은 거울은 무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저 배우는 사람(學人)이 마음에 물들인 바가 없어 망심이 나지 않는다. 나라는 것과 상대라는 것, 즉 아소(我所)의 마음이 멸해서 자연히 청정하고, 청정한 까닭에 능히 보는 것을 낸다. [법구경]에 이르되 '필경에는 공(空) 가운데서 불꽃이 치성하게 일어나듯이 건립한다. 이 사람이 선지식이다.
4. 자성청정의 자리
문: [열반경] 금강신품(金剛身品)에 '가히 보지 못하나 또 분명하게 보며, 아는 것이 없으나 또 알지 못한다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답: 가히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성의 근본 자리가 모양이 없어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보아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체(體)가 고요하고 담연해서 가고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떠나지 아니하면서 세상은 흐르되 이것은 흐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조금도 걸릴 것이 없어 평평하고 자유자재로 분명하게 본다.
안다고 하는 것이 있을 것이 없다. 자성이 모양이 없으므로 본래 분명함이 없는 이것의 이름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알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은 분별함이 없는 체(體) 가운데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쓰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 만약 일체를 분별하고자 할진댄 일에 있어서 알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이를 알지 아니한 바가 없다고 한다. 반야게(般若偈)에 이르되 ‘반야는 아는 것이 없으나, 일에 있어 알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반야는 보는 것이 없으나 또한 일에 있어 보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5. 유무를 보지 않는다.
문: 경에서 이르기를 '있고 없는 것을 보지 아니하는 즉 이것이 진실한 해탈이다.'고 하니 어떤 것이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는 것 입니까?"
답: 깨끗한 마음을 증득하여 얻었을 때에는 곧 이름하여 있다(有)고 한다. 그 가운데 깨끗한 마음을 얻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즉 이름하여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는 생각을 얻고서, 나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니 곧 이것이 '없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이르되 있음과 없음을 보지 못한다고 한 것이니라.
[능엄경]에 이르기를 '알음알이(知見)로 아는 것을 세우면(立知) 무명(無明)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지견에는 보는 것이 없다. 이것이 곧 열반이며, 또한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6. 본다고 하는 성품
문: 어떤 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답: 만약 남자나 여인을 본다거나 그 밖의 색상을 보더라도 그 가운데 애증(愛憎)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로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곧 이것은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다.
문: 일체 색상을 대할 때는 곧 이름하여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색상을 대하지 않을 때에는 또한 이름하여 보지 않는 것입니까?
답: 본다.
문: 물건을 대할 때는 있음을 따라 보지만, 물건을 대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보는 것이 있습니까?
답: 지금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물건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까닭인가? 보는 성품이 항상한 고로 물건이 있을 때도 곧 보고 물건이 없을 때도 또한 본다. 물건은 스스로 가고 오는 것이 있지만, 본다고 하는 성품은 가고 오는 것이 없느니라. 모든 근이 또한 이러하다.
문: 물건을 바로 볼 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있는 것입니까?
답“ 보는 가운데에는 물건이 서지 못 하느니라.
문: 물건이 없는 것을 바로 볼 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없다는 것(無物)이 있습니까?
답: 보는 가운데는 물건 없다는 것(無物)도 세우지 못하느니라.
7. 소리를 듣는 자
문: 소리가 있을 때에는 곧 듣는 것이 있는데, 소리가 없을 때에도 도리어 듣는 것이 있습니까?
답: 또한 듣는다.
문: 소리가 있을 때에는 있음을 따라 듣지만, 소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듣습니까?
답: 지금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소리가 있고 없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까닭인가? 듣는 성품이 항상한 고로 소리가 있을 때에도 듣고 소리가 없을 때에도 또한 듣는다.
문: 이와 같이 듣는 자는 누구입니까?
답: 이 자성이 듣는다. 또한 이름하여 아는 자가 듣느니라.
8. 돈오문(頓悟門)의 종(宗)과 체(體)
문: 이 돈오문에는 무엇으로 종(宗)을 삼고, 무엇으로 뜻(旨)을 삼고, 무엇으로 체(體)를 삼고, 무엇으로 용(用)을 삼습니까?
답: 생각이 없는 것(無念)으로 종을 삼고, 망념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뜻을 삼고, 청정한 것으로 체로 삼고, 지혜로써 용을 삼는다.
문: 이미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무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생각이 없는 것 입니까?
답: 무념이란 삿된 생각(邪念)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정념(正念)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문: 어떤 것이 삿된 생각입니까? 어떤 것을 이름하여 정념이라 합니까?
답: 있다(有)는 생각과 없다(無)는 생각을 곧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유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곧 이름하여 정념이라 한다.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는 것을 곧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정념이라 한다. 고통 즐거움, 나는 것 죽는 것, 취하는 것 버리는 것, 원망하는 것 친한 것,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까지 아울러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고통과 즐거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정념이라 하느니라.
문: 어떤 것이 바른 생각 입니까?
답: 정념이라는 것은 오직 보리(菩提)를 생각하는 것이다.
문: 보리는 가히 얻는 것입니까?
답: 보리는 가히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문: 이미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어째서 오직 보리를 생각합니까?
답: 다만 보리라고 한 것은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으로, 실로 얻지 못하느니라. 또한 앞도 뒤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니라. 가히 얻지 못하는 고로 생각이 있을 것이 없다. 다만 생각이 없을진대, 이 이름이 참 생각(眞念)이니라. 보리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이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이니라. 다만 위에서 설한 것과 무념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일을 따라 방편으로 말한 것이며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다 한가지로 한 몸으로,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단지 일체처에 무심한 줄을 아는 즉 이것이 무념이니라. 무념을 얻을 때 자연히 해탈한 것이니라.
9. 성인의 행
문: 어떤 것이 부처님의 행입니까?
답: 일체행을 하지 않는 것을 곧 이름하여 부처님 행이라 한다. 또 이름하여 바른 행(正行)이라 하고, 또 이름하여 성인의 행(聖行)이라 한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은 유무 증애 등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대율]5권 보살품에 이르되 일체 성인은 중생의 행을 행하지 않고, 중생은 이와 같은 성인의 행을 행하지 아니한다.
10. 지음이 없는 눈
문: 어떤 것이 바르게 보는 것(正見)입니까?
답: 보되 본 바가 없는 것(見無所見)을 곧 이름하여 정견이라 한다.
문: 어떤 이름이 보되 본 바가 없다는 것입니까?
답: 일체 색을 볼 때 물들어 집착하는 것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염착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즉 이름하여 보되 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보되 본 바가 없는 것을 얻었을 때 곧 부처님의 눈이라 하며, 다시 별다른 눈이 없다. 만약 일체 색을 볼 때 애증을 일으키는 것은 곧 이름하여 보는 바가 있다(有所見)고 하는 것이다. 보는 바가 있는 것은 중생의 눈이라. 다시 별다른 눈으로 중생의 눈을 지음이 없다. 나아가 모든 근이 또한 이와 같다.
11. 육바라밀의 으뜸
문: 이미 지혜(智)로써 쓴다(用)고 말하니, 무엇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 두 가지 성품이 공적한 것을 아는 것이 곧 해탈이며, 두 가지 성품이 공적한 것을 모르는 것이 곧 해탈을 얻지 못한 것이니, 이것을 지라고 하고 또한 삿되고 바른 것을 요달했다(了邪正)고 하며, 또한 채용을 안다(識體用)고 한다.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체이고,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곧 이 해탈이니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이 용이다.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유무 선악 애증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이름하여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고 한다.
뮨: 이 문에는 무엇을 쫓아 들어갑니까?
답: 단바라밀을 쫓아서 들어가느니라.
문: 부처님이 육바라밀이 보살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연고로 단바라밀 하나만 말씀하십니까? 어떻게 구족하게 들어갑니까?"
답: 미혹한 사람은 오도(五度)가 모두 단도(檀度)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단도를 닦는 것이 육도(六度)를 실로 구족하게 한다.
문: 어떤 인연으로 단도라고 합니까?
답: 단(檀)이라는 것은 이름이 보시(布施)니라.
문: 무슨 물건을 보시합니까?
답: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답: 보시는 선악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요, 유무의 성품, 애증의 성품, 공과 불공의 성품, 정(定)과 부정(不定)의 성품, 깨끗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는 성품을 버리는 것이다. 일체를 실로 다 보시해 버린즉 두 가지 성품이 공한 줄을 얻는다.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을 얻었을 때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는 생각을 짓지 않고, 또한 보시한다는 생각도 짓지 않는즉 이것이 단바라밀을 진실로 행하는 것이며 이름하여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졌다는 것이다.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 것이 곧 일체 법성이 공한 것이니라. 법의 성품이 공했다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無心)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일체처에 무심한 것을 얻었을 때는 곧 하나의 모양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어떠한 까닭인가? 자성이 공한 고로 하나의 모양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하나의 모양도 가히 얻을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실상(實相)이니라. 실상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묘색신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 이르되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의면 곧 이름이 모든 부처님이니라.
문: 부처님께서 육바라밀을 설하셨는데, 지금 어떻게 하나가 곧 능히 모든 것을 구족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원컨대 하나가 육법을 갖춘 원인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사익경]에 이르되 “망명존자가 범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일체 번뇌를 버리면 이름하여 단바라밀이라고 하고, 곧 이것이 보시니라. 모든 법에 마음을 일으킨 바가 없는 것을 시라바라밀이라고 하며, 곧 이것이 곧 지계니라. 모든 법에 있어서 상하는 바가 없는 것을 찬제바라밀이라 하며, 곧 이것이 인욕이니라. 모든 법에 상을 여읜 것이 비리야바라밀이라 하며, 곧 이것이 정진이니라. 모든 법에 머무른 바가 없는 것을 선바라밀이라 하며, 곧 이것이 선정이니라. 모든 법에 희론이 없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곧 이것이 지혜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6법이라 한다.
이제 다시 6법을 이름하니 다르지 않다. 첫째는 버리는 것(捨)이요, 둘째는 일어나는 것이 없음(無起)이요, 셋째는 생각이 없음(無念)이요, 넷째는 상을 여읜 것(離相)이요, 다섯째는 머무른 바가 없는 것(無住)이요, 여섯째는 희론이 없는 것(無戲論)이다.
이와 같은 6법은 사행을 따른 방편이며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니,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도 없고 다를 것도 없다. 다만 하나를 버리면 일체를 버리는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無起) 일체 중생심이 일어나지 않는(一切無起) 줄을 알아야 할지니. 미한 중생은 알지 못하여 실답게 차별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법수에 막혀 곧 오랜 동안 생사에 윤회함이라. 너희 배우는 학자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다만 단바라밀 한 법을 닦으면 곧 만법이 두로 원만하니 하물며 5도(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어찌 다 갖추어 있지 아니하랴.“ 하였다.
12. 세 개의 문
문: 삼학 등을 쓰는데, 어떤 것이 삼학이며 이것을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답: 삼학이란 계정혜(戒定慧)가 이것이니라.
문: 어떤 것이 계정혜입니까?
답: 청정해서 물들 것이 없는 것이 계(戒)이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아 모든 경계에 대 적연한 것이 정(定)이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움직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마음이 청청한 줄을 알았을 때 청정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내지 선과 악을 다 능히 분별하면서 그 중에 물들일 것이 없이 자재하게 되는 것을 이름하여 혜(慧)라고 한 것이니라.
만약 계정혜의 체를 안다면 함께 얻지 못할 때에 분별할 것도 없는 것이니 즉 한 몸이라. 이 이름이 계정혜 삼학을 평등하게 쓰는 것이다.
13. 머무르지 않는 마음
문: 만약 마음이 청정한 데 머물렀을 때 깨끗한 데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답: 깨끗한 데 머물렀을 때 깨끗하다는 생각을 짓지 말지니라. 이것이 깨끗한 데 집착한 것이 아니니라.
문: 마음이 공했을 때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답: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지었다면 곧 이름하여 공에 집착한 것이니라.
문: 만약 마음이 머무를 곳이 없다는 데 머물렀다면, 이것은 머무를 곳이 없는데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답: 다만 공했다는 생각을 지었다면 있을 것이 없이 다 집착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머무른 바가 없는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자 할 때에는 바르게 앉았을 때 다만 마음으로 일체의 물건을 사량하지 말 것이며, 일체 선악을 도무지 사량하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사량하지 말라. 그러면 과거의 마음이 끊어진 것이니 즉 이름하여 과거의 일은 없는 것이라 한다. 미래의 일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 미래의 일은 스스로 끊어진 것이니 곧 이름하여 미래의 일은 없는 것이라 한다.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이니, 일체 사에 다만 주착한 바가 없음을 알라.
주착함이 없다 것은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니라. 곧 무착이라. 현재심이 스스로 끊어진즉 이름하여 현재사가 없다는 것이니라. 삼세를 거둘 수 없음을 이름하여 삼세가 없다고 한다.
마음이 만약 일어나서 갈 때 곧 따라가지 말라. 가는 마음이 저절로 끊어진다. 만약 머무를 때 또한 머무름을 따라가지 말라. 머무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니라. 곧 이것이 머무르되 머무르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만약 분명하게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할지니 머무름이 있을 때 다만 머무른 것뿐이다.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것도 없다. 만약 스스로 분명히 요달하여 알면 마음이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곧 이름하여 본심을 분명히 깨달아 본 것이니라. 또한 이름하여 분명히 견성한 것이다. 이것이 다만 일체처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라. 곧 이것이 부처님 마음[佛心]이며, 또한 해탈한 마음이라 하고, 또한 보리심(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각, 최상의 진리)이라 하며, 또한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이라 하고, 또한 색성이 공한 것이라 하니라.
경에 이르되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했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은 것을 얻지 못했을 때는 노력하고 노력하라. 더욱 부지런히 공력을 들여라. 공력을 이루면 스스로 알게 되고,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인 것이다.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가차해서 참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차한다는 것은 애증심이 이것이며, 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가지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이다.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은 자연히 해탈이다.
14. 일상에서의 화두
문: 다만 앉아서 쓰는 것이 행할 때에도 쓸 수가 있습니까?
답: 이제 공을 쓴다(用功)고 말하는 것은 앉는 것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행하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데에서 짓는 바 일체를 운전할 때 항상 쓰되 간단(間斷)이 없다. 곧 이름하여 상주(常住)이니라.
15. 다섯 가지 법신
문: 방광경에 이르되 다섯 가지 법신이 있습니다. 첫째는 실상법신이요, 둘째는 공덕법신이요, 셋째는 법성법신이요, 넷째는 응화법신이요, 다섯째는 허공법신이니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내 몸입니까?
답: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한 것을 안다면 이것이 실상 법신이요, 마음이 만상을 다 머금고 있는 줄 안다면 이것이 곧 공덕법신이고, 마음이 무심한 줄 알면 이것이 곧 법성법신이며, 근기를 따라서 말하는 것이 응화법신이라. 마음의 모양이 없어서 가히 얻지 못한 줄 안다면 이 것이 허공법신이니라. 만약 이 도리를 깨달아 아는 자는 곧 증득함이 없는 줄 알지니라.
얻음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는 자는 곧 이것이 불법을 증득한 법신이 된다. 만약 증득함이 있고 얻음이 있다면 이것은 증득함을 삼는 자라 곧 삿된 견해요 증상만인이니 이름하여 외도이니라. 어떤 까닭인가?
[유마경]에 이르되 사리불이 천녀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증득해서 이와 같은 변설을 얻었느냐?’ 천녀가 답하되 ‘나는 얻은 것도 없고 증득한 것도 없다는 이와 같은 것을 얻었습니다.’ 하였느니라. 만약 얻은 것이 있고 증득함이 있다면 이것은 불법 가운데 중상만인이니라.
16. 등각과 묘각
문: 경에 이르되 등각묘각이라 했는데 어떤 것을 등각이라 하며 어떤 것을 묘각이라 합니까?
답: 곧 색이요 곧 공인 것을 이름하여 등각이라 하고,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고로 묘각이라 한다. 또 이르기를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이 없다는 것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묘각이라 하느니라.
문: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답: 사를 따라 방편으로 두 가지 이름을 세운 것이니라. 본체는 이 하나이니, 둘도 없고 다름도 없으며 내지 일체법이 다 그러하다.
17. 경멸당하고 장애가 생길 때
문: [금강경]에 이르되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설법이다.“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어떠한 것입니까?
답: 반야의 근본체는 필경에 깨끗해서 한 물건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이 이름이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저 반야의 공적한 체 가운데 항하의 모래처럼 공덕을 갖추어 쓴다. 곧 사에 있어 알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이름하여 설법이라고 한다. 고로 이르되,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며 이 이름이 설법이니라.
문: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할 때 사람이 경멸하고 천시한다면 이 사람은 선세 죄업으로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것인데, 금세의 사람이 경멸하고 천시하는 고로 선세 죄업이 곧 소멸하게 되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답: 다만 어떤 사람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오직 모든 악업만 지음으로써 청정본심이 저 삼도무명에 덮여 피해를 입어 능히 요달하여 나투지 못함일세,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경멸하고 천시한다는 것이다. ‘금세의 사람이 경멸하고 천시한다’는 것은 바로 금일에 발심해서 불도를 구하니 무명이 다하고 삼독이 나지 아니하고 다시는 어지러운 잡된 생각이 없음일세, 모든 악이 영원히 멸해버린다. 그런 고로 금세의 사람이 경멸하고 천시한다는 것이다. 무명이 멸하여 다하니 어지러운 생각이 나지 아니할세, 자연히 해탈이라. 그런 고로 이르되, 마땅히 보리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한즉 발심할 시기는 그 이름이 금세라, 먼 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 또한 이르되 여래의 다섯 가지 눈이란 무엇인가요?
답: 색이 청정한 것을 보니 이름하여 육안이라고 한다. 체가 청정한 것을 보니 이름하여 천안이라 한다. 저 모든 색의 경계와 내지 선악과 실로 미세한 분별까지 물들어 집착한 바가 없어 그 가운데 자재하니 이름하여 혜안이라 한다. 보아도 본 바가 없으니 이름하여 법안이라 한다. 보는 것이 없되 보는 것이 없다는 것도 없으니 이름하여 불안이라 한다.
문: 또한 이르되, 대승과 최상승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대승이라고 하는 것은 보살승이며 최상승은 불승이라.
문: 다시 묻되, 어떻게 닦아서 이 승을 얻습니까?
답: 보살승을 닦는 것은 곧 대승이라. 이것을 보살승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하니 닦을 바가 없는 곳에 이르러서 담연상적하고 부증불감하는 것을 이름하여 최상승이라 하며 곧 이것이 불승이니라.
18. 지혜로 묘용을 쓰다
문: [열반경]에 이르되 정(定)은 많으나 지혜가 적으면 무명을 여의지 못하고, 정은 적으나 지혜는 많다면 삿된 견해만 더욱 늘어난다. 정과 지혜가 균등한 고로 곧 이름하여 해탈이라 한다 했으니 그 뜻이 어떠합니까?
답: 일체 선과 악을 대해서 실로 능히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다. 일체를 분별하는 곳에서 애증을 일으키지 않으며, 따르는 바 물들지 않는 것이 정이라. 이것이 정과 혜를 균등하게 쓰는 것이니라.
문: 말도 없고 설하는 것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정이라고 하는데, 바른 말을 설할 때에 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까?
답: 이제 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하고 설하지 않는 것을 논하지 않으며, 항상 정(常定)이라. 어떤 연고인가? 정에 대한 성품을 쓸진댄, 분별을 말할 때 분별을 설함이 곧 정이니라. 만약 공(空)한 마음으로 색(色)을 관할 때라면 곧 색을 관할 때 그것이 공이며, 만약 색을 관하지 않고 설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라면 그 역시 공이라.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이 역시 이러하다. 어떤 연고인가? 자성 공한 것이다. 저 일체처에 있어 실로 모두 공이니라. 공한즉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는 즉 이것이 평등하게 정혜를 다 쓰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이 항상 쓰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등한 공의 법이 바로 구경을 이룬다. 그런 고로 이르되 정과 혜가 균등한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것을 해탈이라고 이름한다. 이제 다시 너희를 위하여 비유해서 나타내 보일 것이니 정녕코 너희들이 분명하게 의심을 끊게 하리라. 비유하건데 밝은 거울이 모양을 비칠 때, 밝은 거울이 움직이는가? 아니니라. 비치지 않을 때도 또한 움직이는가? 아니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밝은 거울이 쓸 때에 정(情)이 없이 밝게 비친다. 그러므로 비칠 때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비치지 않을 때에도 또한 움직이지 아니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정(情)이 없는 가운데에는 움직이는 것이 있을 것이 없으며 또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또한 해가 세상을 비칠 때 그 빛이 움직이는가? 아니니라. 만약 비치지 않을 때에는 움직이느냐? 아니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빛은 정(情)이 없는 고로 쓰되 무정의 빛이 비치며 그래서 움직이지 아니한다. 비치지도 아니하고 또한 움직이지도 아니한다. 비치는 것은 지혜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정(定)이니라. 보살은 정혜를 균등하게 법을 쓰니 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라. 고로 이르되 정혜를 균등하게 쓰는 것이며 즉 해탈을 얻는 것이니라. 지금 무정(無情)을 말하는 것은 범부의 정이 없다는 것이지 성인의 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니라.
문: 어떤 것을 범부의 정이라 하고, 어떤 것을 성인의 정이라 합니까?
답: 만약 두 가지 성품을 일으키면 범부의 정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고로 성인의 정이니라.
19. 뜻을 얻으니 말이 끊어진다.
문: 경에 이르기를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졌다 하는데 그 뜻이 어떤 것입니까?
답: 말로써 뜻을 나타내고 뜻을 얻으니 말이 끊어진다. 뜻이 곧 공했음이니 공은 곧 도이며 도는 곧 이 말이 끊어진 자리니라. 고로 이르되 언어도단이라 한다. 심행처멸은 뜻의 실제를 얻어 다시 관을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다.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한 까닭에 남(生)이 없다. 남이 없는 까닭에 일체의 색의 성품이 공하며 색의 성품이 공한 까닭에 곧 만 가지 인연이 끊어졌으니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진 것이 곧 심행처멸이니라.
20. 여우를 사자인 줄 알고
문: 여여하다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답: 여여(如如)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이 진여인 까닭에 이름하여 여여라고 한 것이다. 이를 알아야 과거의 여러 부처님도 이런 행을 행하여 성도하였고, 현재의 부처님도 또한 이 행을 행하여 성도하며, 미래의 부처님도 이런 행이 있어서 또한 성도하실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닦아서 증득한 도와 다름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여여라고 한 것이다.
[유마경]에 이르되 '모든 부처님이 또한 똑같다. 저 용화세계 미륵 부처님에 이르러서도 다를 바가 없다. 일체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불성이란 끊어지지 않는 성품이 있는 까닭이니라.‘라고 하였다.
21. 보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
문: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하는 것이 몰록 깨닫는 것입니까?
답: 그렇다.
문: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한 것이고, 또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답: 마음에 물들은즉 색이요, 마음에 물드는 것이 없는 즉 공이다. 마음이 물드는 것이 있는즉 범부요, 마음에 물드는 것이 없는 것은 성인이라. 또 이르되 진공은 묘유라 색에 즉했다. 색은 가히 얻을 수 없는 까닭에 곧 공이니라, 지금 말하는 공이라는 것은 이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한 것이지 색이 멸해서 공한 것이 아니다. 지금 말하는 색이라는 것은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라고 한 것이지 감각되는 색이 능히 색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22. 다하되 다할 수 없는 법문
문: 경에서 말한 '다하되 다할 수 없는 법문'은 어떤 것입니까?
답: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보고 듣는 것에서 남이 없으니 이것이 다 한 것이며, 다했다는 것은 모든 망루(妄漏)가 다했다는 것이다.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남이 없는 본체 가운데 항하사와 같은 묘용을 갖추어서 일에 따라서 응하여 나타낸다. 실로 다 구족하여 본체 가운데 또한 덜고 감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다함이 없다고 한 것이니라. 곧 이것을 가지고 다하되 다함이 없는 법문이라고 한 것이다.
문: 다함과 다함이 없음은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답: 본체는 하나이나 말로 나타내면 모두 다름이 있다.
문: 체는 하나인데 어찌 설은 다릅니까?
답: 하나라고 하는 것은 말의 본체[體]이며, 말을 하는 것은 본체의 작용이니 일을 따라서 응하여 쓰는 까닭에 본체는 같지만 말하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비유하면 하늘에 뜬 하나의 해 아래에 여러 개의 그릇에 물을 채워 놓으면 그 하나하나의 그릇 가운데 모두 해가 있다. 모든 그릇 가운데 있는 해는 실로 다 원만해서 천상의 해와 더불어 차별이 없는 까닭에 본체는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릇을 따라서 이름을 세우면 곧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다름이 있는 까닭에 본체는 같지만 말로 나타내면 다름이 있다고 한다. 나타나는 모든 해가 다 원만해서 저 천상의 본래의 해와 조금도 덜하고 감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다함이 없다고 말한다.
23.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문: 경에 이르되 ‘불생불멸’이라 하니 어떤 법이 불생이고 어떤 법이 불멸입니까?
답: 선(善)이 아닌 것이 불생이고(불선이 생하지 않으며), 선법이 불멸이다(선법이 멸하지 않는다).
문: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불선입니까?
답: 불선은 물들고 새는 마음이고, 선법은 물들고 새는 마음이 없음이니라. 다만 물들지 않고 새지 않으면 바로 불선이 불생이고, 무념과 무루를 얻으면 곧 맑고 깨끗하며 원만하게 밝아서 그윽하게 항상 고요하여 끝없이 바뀌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선법은 멸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니라. 이것이 곧 불생불멸이다.
24. 참부처님의 아들
문: [보살계경]에 이르되 '중생이 부처님의 계를 받으면 곧 모든 부처님의 위치에 들어가서 지위가 한가지로 대각이어서 참으로 부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답: 부처님의 계라고 하는 것은 청정심이 이것이라.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해서 청정행을 수행하여 받은 바가 없는 마음 얻었음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계를 받았다고 한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다 청정해서 받을 것이 없는 행을 닦아서 모두 불도를 이루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발심해서 받음이 없는 청정행을 닦으면 곧 부처님과 더불어 공덕을 똑같이 쓰니 차이가 없느니라. 그런 고로 이르되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같은 까닭에 그 위치가 대각의 자리와 한가지로 같다고 말한다. 진실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은 청정심으로부터 생기니 지혜가 청정함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또한 이름하여 참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이름해서 참불자라고 하는 것이다.
25. 부처님이 먼저인가 법이 먼저인가?
문: 부처님과 법에 같다면 부처님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법이 먼저입니까? 만약 법이 먼저 있었다면 그 법은 어떤 부처님이 설했으며, 만약 부처님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받들어 도를 이루었습니까?
답: 부처님이 법보다 먼저 있었고, 또한 법보다 뒤에 있었던 것이다.
문: 불과 법의 선후는 무엇에 따른 것입니까?
답: 만약 적멸법에 의거한다면 법이 먼저이고, 부처님이 뒤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문자법에 따르면 부처님이 먼저이고 법은 뒤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부처님이 모두 적멸법에 의하여 성불하였으므로 곧 법이 먼저이고 부처님이 뒤이다.
경에서 이르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은 법'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도를 얻는 이후에는 12부경을 자세히 설하고 또 모든 중생을 이끌어 교화하니 중생이 불법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하여 성불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먼저요 법이 뒤가 되는 것이다.
26. 설통(說通)과 종통(宗通)
문: 어째서 설은 통하고, 종은 통하지 못했다고 합니까?
답: 말과 행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설은 통하고 종은 통하지 못한 것이니라.
문: 어떤 것이 종도 통하고 설도 통하는 것입니까?
답: 말과 행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곧 이것이 설도 통한 사람이요 종체도 또한 통한 사람이니라.
27. 이르고 이르렀다는 것
문: 경에 이르되 '이르되 이르지 아니하고, 이르지 아니하되 이르는 법'이라고 하였으니 무엇을 말합니까?
답: 설하는 데 이르렀지만 행에는 이르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이르되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행하는 것은 이르렀으나 설하는 것은 이르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이르지 못했으나 이르렀다고 한다. 행과 설이 함께 이른 것을 이름하여 이르고 이르렀다고 한다.
28. 끝없이 쓸 수 있는 유위
문: 불법은 유위(有爲)를 다하지 아니하면서 또 무위(無爲)에도 머무르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유위를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까?
답: 유위에 다하지 아니함은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을 이루고, 후에 쌍림에 이르러서 열반으로 옮겨 들어가기까지 일체의 법을 모두 버리지 않는(세간의 일체 현상을 중생과 똑같이 하여 버리지 않는) 것을 일어 곧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무위(無爲)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무념을 닦았으나 무념으로 증명하지 않고, 비록 공을 닦았으나 공으로써 증명하지 않는다. 비록 보리 열반을 닦아 형상도 없고 지음도 없으나 형상도 없고 지음도 없음으로써 증명하지(밝히지) 않는 것이 곧 무위에도 머무르지 않음이다.
29. 지옥은 있는가?
문: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답: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다.
문: 어찌하여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합니까?
답: 마음을 따라서 일체의 악업을 짓는 바라 곧 지옥이 있다. 만약 마음에 물드는 것이 없다면 자성이 공한 고로 곧 지옥이 없느니라."
30. 불성도 지옥에 가는가?
문: 죄를 받는 중생은 불성이 있습니까?
답: 또한 한가지로 불성이 있다.
문: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도 함께 지옥에 들어갑니까?
답: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문: (가령 죄를 받아 지옥에)들어갈 때에 불성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 또한 한가지로 들어간다.
문: 그러면 한가지로 들어가면 중생이 죄를 받을 때 불성도 함께 죄를 받습니까?
답: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한가지로 들어갔으나 중생은 스스로 죄보를 받지만 불성은 받지를 아니한다.
문: 어째서 함께 지옥에 들어갔는데 성품은 고통을 받지 않습니까?
답: 중생은 상이 있으니 상이 있은즉 이루고 무너지는 것이 있다. 불성이라는 것은 상이 없는 고로 상이 없는즉 공성이니라. 이런 까닭에 진공의 성품은 무너질 것이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에 풀을 쌓으면 그 풀은 스스로 무너짐을 받지만 허공 자리는 무너짐을 받지 아니한다. 허공은 불성에 비유한 것이며, 풀섶은 중생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함께 들어가지만 한가지로 받지 아니한다고 하느니라.
31. 흐름을 따르되 머무르지 말라
문: 팔식을 굴려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三身. 법보화)을 이루니, 몇 개의 식이 함께 하나의 지혜를 이루며, 몇 개의 식이 홀로 하나의 지혜를 홀로 하나의 지혜를 이룹니까?
답: 안이비설신 5식이 함께 성소작지를 이룬다. 제6식 의식이 홀로 묘관찰지를 이루고, 제7식 심식은 홀로 평등성지를 이루며, 제8식 함장식이 홀로 대원경지를 이룬다.
문: 이 4지(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답: 근본체는 같되 이름이 다를 뿐이니라.
문: 근본체가 같을진댄 무엇 때문에 이름을 달리 붙이며, 이미 사(事)를 따라서 이름을 세웠을진댄 정히 일체라고 할 때는 그 중 어떤 것이 대원경지입니까?
답: 담연공적하고 두루 밝아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 곧 대원경지니라. 능히 모든 티끌을 대하여 애증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바로 두 가지 성품이 공함 것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한즉 평등성지니라. 일체 경계에 닥쳐서 잘 분별하면서도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자유자재를 얻는 것이 바로 묘관찰지라. 능히 모든 근으로 하여금 일체 모든 사안을 따라서 응용하되 모두 바르게 받아들이는 데 들어가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이 곧 성소작지니라.
문: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을 이룰 때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고,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하나의 몸을 이룹니까?
답: 대원경지가 홀로 법신을 이루고, 평등성지가 홀로 보신을 이루고, 묘관찰지가 성소작지와 더불어 함께 화신을 이룬다. 이 삼신 또한 이름으로 나타내어 분별한 것일 뿐이니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만약에 이 이치를 깨달아 한다면 또한 삼신을 응용할 것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 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것을 근본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또한 머무름이 없음을 근본이라고 할 것도 없다.
32. 부처님을 볼 수 있다면
문: 어찌하여야 부처님의 진신(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답: 유무를 보지 않아야 바로 부처님의 진신을 볼 것이니라.
문: 어떻게 하면 유무를 보지 않고 부처님의 진신을 볼 수 있습니까?
답: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인해서 세워지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니, 본래 있다는 것을 설정하지 않으면 없다는 것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무가 존재하지 않으면 유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쫓아서 얻을 수 있겠는가? 있고 없는 두 가지 모양이 서로 원인이 되어 비로소 있는 것이니 이미 상으로 인해서 있다고 할진댄 그것이 모두 나고 죽는 생멸이니라. 다만 이 두 가지의 견해를 여읜다면 곧 이것이 부처님의 진신을 보는 것이니라.
문: 유무를 오히려 가히 세우지 못하는데 진신은 다시 무엇을 좇아 세우리오?
답: 네가 유를 물은 까닭이니라. 만약 물음이 없을 때에는 진신이라는 이름도 세우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물건의 모양을 대할 때에 상을 나타내나 물건의 모양을 대하지 않을 때는 마침내 모양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과 같으니라.
33. 부처를 여의지 않는 자리
문: 어떠한 것이 항상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답: 마음에 기멸(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없고, 경계를 대함에 고요해서 항상 필경은 공적하니 곧 이것이 항상 부처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라.
34. 머리를 돌이켜서 보라.
문: 어떤 것이 무위법(無爲法 함이 없는 법)입니까?"
답: 유위(有爲 함이 있음)니라.
문: 지금 무위법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유위법이라고 답하십니까?
답: 유는 없는 것으로 인해서 세워지고, 무는 있는 것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본래 있다는 것을 세우지 않으면 없다는 것이 어디서 존재하겠느냐? 만약 참으로 무위를 논하는 사람이라면 유위도 취하지 말고 무위도 취하지 말지니라. 이것이 참으로 무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하냐?
경에 이르되 '만약 법의 상(法相)을 취하면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라. 만약 법상이 아니라는 것(非法相)을 취하면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법도 취하지 말며 법 아닌 것도 취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된 법을 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이치를 깨달아 알면 바로 참해탈이라고 한다. 곧 이것이 둘이 아닌 법문을 안 것이다.
35. 중도와 양변
문: 어떤 것이 중도의 도리입니까?
답: 양변이 중도다.
문: 지금 중도를 물었거늘 어찌 양변이 중도라고 하십니까?
답: 변이라고 하는 것은 중간으로 인해서 세워지고, 중간은 양변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다. 본래 양변이 없다면 중간이 무엇을 쫓아서 있겠느냐? 지금 중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변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알아야 할지니 중간과 양변은 상대로 말미암아 세운 것일 뿐 모두가 무상한 것이니라. 색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
36. 오욕의 독
문: 어떤 것을 이름하여 오음 등이라고 합니까?
답: 색을 대하면 색에 물들고 색을 따라 남을 받는(태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색음이라고 한다. 받아들임에 따라서 팔풍에 들어간다. 삿된 믿음을 즐기면서 모아 놓고는 곧 그것을 따라가서 그 가운데 태어남을 받으니 이름하여 수음이다. 흐릿한 마음으로 생각을 취해서 생각을 따라서 남을 받으니 이름을 상음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모아서 행을 따라 남을 받으니 이름을 행음(行陰)이라 한다. 평등한 몸에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켜서 얽어매고 집착해서 헛된 식(識)으로 남을 받으니 그 이름이 식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음이라고 한다.
37. 속지않는 법
문: 경에 이르기를 '25유'라 하니 어떤 것입니까?
답: 뒤에 받아서 몸이 있는 것이 이것이니라. 뒤에 몸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육도에 태어남을 받는 것이다. 중생이 현세에 있어서 미혹해서 모든 업 짓기를 좋아하여 뒤에 가서는 업을 따라서 받아 남이니 그런 까닭에 뒤가 있다고 한 것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뜻으로 구경의 해탈하는 것을 닦아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곧 영원히 삼계를 떠난 것이니 절대 뒤에 몸을 받지 아니한다. 뒤에 몸을 받지 않는 사람은 곧 법신을 증득한 사람이니 법신은 곧 부처님의 몸이니라.
문: 25유의 이름이 어찌하여 서로 다릅니까?
답: 본체는 본래 하나인데 쓰는 데 따라 이름을 만들어 세워서 25유로 나타내었다. 25유는 10악 10선 오음이다.
문: 어떤 것이 10악 10선입니까?
답: 10악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기어, 양설, 악구, 탐심, 진심, 사견이다. 10선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열 가지 악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38. 육념이 없어야 참생각
문: 위에서 무념을 말씀한 것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답: 일체처에 무심한 것이 무념이라는 것이며, 일체 경계가 없고 구하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 이것이다. 모든 경계의 색을 대해서 마음이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영원히 없으니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무념이라는 것의 이름이 참마음[眞念]이다. 만약 생각으로써 생각을 삼는 자는 즉시 삿된 생각이다. 바른 생각이 아님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경에 이르시기를 '만약에 사람에게 여섯 가지 생각을 가르치면 그 이름이 그릇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생각이 있음을 이름하여 삿된 생각[邪念]이라고 하는 것이니 여섯 가지 생각이 없는 것이 참 생각[眞念]이다‘라고 하였다.
경에서 이르되 '선남자야, 우리가 무념의 법 가운데 머물러서 이와 같은 금색의 32상을 얻었느니라. 대광명을 놓아 세계를 남김 없이 비춘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공덕은 부처님이 말씀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나머지 승(乘)이 능히 알겠느냐.‘라고 하였다.
무념을 얻은 사람은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물든 바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부처님의 지견에 얻어 들어간다. 이와 같이 얻은 사람을 이름하여 불장(佛藏)이라고 하며, 또한 법장(法藏)이라고 하니 곧 능히 일체 부처님이고, 일체의 법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생각이 없는 까닭이니 경에 이르되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이 경을 쫓아서 나왔다.'고 하였다.
문: 이미 무념이라고 부르면서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간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세운 것입니까?
답: 무념을 좇아서 세운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경에 이르되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모든 법을 세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되 '비유하면 밝은 거울과 같다.'고 하였으니 거울 가운데는 비록 모양이 없으나 능히 만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어째서 그러한가. 거울이 물들임이 없는 까닭에 망년이 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이나 사람이라는 것이나 마음까지도 사라져서 필경에는 청정한 까닭에 무량한 지견을 능히 낸다.
몰록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생을 여의지 않고 곧 해탈을 얻음이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비유컨대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났을 때 곧 참사자인 것과 같다.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돈오를 닦을 때에 곧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마치 대나무에 봄이 되면 죽순이 나서 그 봄을 여의지 않고 곧 어머니(본래의 대나무)와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과 같다. 어째서 그러하냐? 마음이 공한 까닭이니 돈오를 닦는 사람 또한 이와 같다.
망념을 몰록 제거하여 영원히 아상 인상이 끊어졌으니 필경에는 공적하여 곧 부처님과 더불어 같아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범부요 성인이라고 한다. 돈오를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떠나지 않고 곧 삼계를 뛰어난다. 경에 이르되 '세간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간을 벗어나며,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들의 여우가 사자를 따라서 좇아다니지만 백천 겁이 지나도 끝내 사자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 진여의 성품은 실로 공한 것입니까? 실로 공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상이 있는 것이며, 만약 공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곧 단멸이니 일체 중생이 마땅히 무엇을 의지하여 닦아야 해탈을 얻겠습니까?
답: 진여의 성품은 공이면서 또한 공이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진여의 묘체는 모양도 없고, 또한 상이 없어서 가히 얻지 못하니 이를 일러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해서 모양이 없는 체 가운데 항하사의 용이 만족하게 각추어서 곧 일에 응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불공(不空)이라고 한다.
경에 이르되 '하나를 알면 천 가지가 따라서 해결되고, 하나를 미혹하면 곧 만 가지가 함께 미혹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를 지키면 만사를 다 마치니 이것이 도를 깨닫는 묘함이다. 경에 이르되 '삼라와 만상이 한 법이 인을 친 바이니라.' 하였으니 어떻게 해서 한 법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견해를 내는가?
이와 같이 공업 말미암아 행함이 근본이 되니라. 만약 마음을 항복받지 아니하고 글을 의지해서 증득하려 하고자 하면 옳지 않다. 자기도 미치게 하고 남도 미치게 만들어 피차간에 함께 컴컴한 귀신굴에 떨어진다.
노력하고 노력하라. 세밀하고 세밀하게 살펴보라. 다만 무슨 일이 나에게 올 때 받지 아니하여 일체처에 무심하니 이와 같은 것을 얻은 사람은 곧 열반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둘이 아닌 법문이라 하며, 또한 이름하여 다툼이 없다고 하고, 또한 이름하여 일행삼매라고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필경에는 청정하여 아상과 인상이 없는 까닭이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것으로 이것이 보는 바가 없음이요 곧 이것이 진여의 얻음이 없는 변론이다. 이 논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해주지 말아라. 오직 견해가 같고 행함이 같은 차원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라. 마땅히 앞 사람이 성실한 신심이 있어서 감히 어떠한 데 임해도 물러나지 아니하는 사람인지 관찰할 것이니 이런 사람을 위하여 가히 설해주고 보여주어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니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함 것이지 명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이 설한 바 천 가지 경전과 만 가지 논은 오직 중생이 미혹한 까닭에 마음과 행동이 같지 아니하므로 삿된 것을 따라서 이에 대응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곧 차별이 있는 것이다.
구경해탈의 이치를 논할진댄 다만 일이 옴에 받지 아니하며, 일체처에 무심하여 영원히 고요하여 허공과 같아서 필경에는 자연히 해탈할 것이니라. 너는 헛된 이름을 구하지 마라. 입으로 진여를 설하면서 마음이 원숭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것을 이름하여 스스로 속는 것이라고 하니 응당 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한 세상의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지 말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랜 겁의 재앙을 받게 되니 노력하고 노력하라. 중생은 스스로 자기를 제도해야 하니 부처님이 능히 너를 제도하지 못한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한다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티끌 수와 같아서 일체 중생을 모두 응당 제도하여 마쳤을 것인데 어떤 까닭으로 우리들이 지금까지 생사의 바다를 유랑하면서 성불을 하지 못하였는가? 마땅히 알라. 중생이 스스로 자기를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능히 제도해 주지 못한다. 그러하니 노력하고 노력할 것이로다. 스스로 닦을 뿐 부처님의 힘을 절대 의지하지 마라. 경에 이르되 '대저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님에게 집착해서 절대 구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39. 일대사를 마치지 못하는 고통
문: 내세 중에 잡된 도를 배우는 무리가 많이 있을 것인데 어떻게 같이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답: 다만 마음의 빛을 온화하게 하면서 그 업은 함께 하지 마라. 같은 장소에 있으나 그 사람과 함께 머무르지 마라. 경에 이르되 '흐름을 따르나 성품은 항상하다.'고 하였느니 다만 이와 같이 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일대사인연 해탈의 일을 위해야 한다. 함께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배우는 사람을 부처님같이 공경하라. 자기의 덕을 높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질투하지도 말며 스스로 자기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말지니라. 일체 모든 곳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쾌락하리라. 거듭 게송을 설하여 말하리라.
인욕하는 것이 제일의 도라
먼저 모름지기 아상 인상을 제거하라.
일이 옴에 받을 것이 없어야
참으로 보리를 깨달은 사람이 된다.
[금강경]에 이르되 '보살은 나도 없고 법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여래가 이름하여 말하기를 참다운 보살이라고 했다,' 또 이르되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영원히 생사를 끊어서 일체처에 무심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열반경]에 이르되 '여래께서는 열반을 증득하셨기 때문에 영원히 생사가 끊어졌다.'라고 하고 게송을 설하였다.
내 지금의 뜻이 크게 좋아서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고 꾸짖을 때도 고뇌가 없네.
말이 없으며, 시비를 논하지 아니한다.
열반과 생사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
자기 집의 본지풍광을 깨달아 알면
본래부터 푸르고 검은 것이 있을 것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일체의 망상분별을 꺠달아 요달하지 못하네.
말세 범부에게 한 말 붙이노니
마음 가운데 고초(북잡한 풀 덩어리)를 제거해서 없애라.
내 지금의 뜻이 크고 넓어서
말하지 아니해도 일이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조용히 스스로 마음대로 해탈을 해서
동이나 서로 가되 쉬워서 어렵지 않다.
종일토록 말이 없이 적막해서
생각 생각이 항상 이치를 향하여 보는 사람이라.
자연히 소요자재하여 항상 도를 보고 있으니
생사에 전혀 관계를 받지 아니한다.
내가 지금 뜻이 크게 기특해서
모든 세상에서 속임을 당하고 침해 당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모두 다 헛된 속임수이니
떨어진 옷과 거친 밥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길에서 만나는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게으르다고 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어리석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세상 모든 것이 질린 듯이 암둔하나
마음속에는 밝기가 유리와 같고
묵묵히 라훌라의 밀행과 계합하니
너희 범부들이 알 바가 아니다.
내가 너희들이 참해탈의 이치를 알아서 밝히지 못할까 두려워서 다시 너희들에게 이러한 말을 전해주노라.
40. 깨끗한 마음
문: [유마경]에 이르되 '너희들이 정토를 얻고자 할 때는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라고 하니 어떤 것이 깨끗한 마음입니까?
답: 필경에는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필경에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다는 것입니까?
답: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다고 하는 것도 없는 것이 필경의 깨끗함이다.
문: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답: 일체 모든 것에 있어서 무심함이 깨끗한 것이다. 깨끗함을 얻었을 때 깨끗하다는 생각을 지어서 얻지 못함을 곧 이름하여 깨끗함이 없다고 한다. 깨끗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도 또한 깨끗함이 없다고 하는 생각도 지어서 얻지 못하니 곧 이것이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41.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것
문: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으로써 증득합니까?
답: 마지막에 증득하는 것으로 증득하는 것을 삼는다.
문: 어떤 것이 필경에 증득함입니까?
답: 증한 것도 없고, 증한 것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이름해서 필경에 증함이라 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증득함이 없음이며, 어떤 것이 증득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답: 밖으로 색과 소리 등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는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와 같이 얻음을 이름하여 증득이라고 한다. 증득하였을 때 증득하였다는 생각을 갖지 않음을 이름하여 무증이라고 한다. 이 증득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 또한 증득함이 없다는 생각을 짓지 않음을 이름하여 증득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42. 활발발한 안목
문: 어떤 것이 해탈심입니까?
답: 해탈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해탈심이 없다는 것도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참해탈이라고 한다. 경에 이르되 '법도 응당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법이라는 것은 있음이며, 비법이란 없음이다. 다만 있음와 없음을 취하지 아니하는 것 그것이 참해탈이다.
43.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문: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답: 필경에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는다.
문: 어떤 것이 필경에 얻음입니까?
답: 얻음이 없으며, 얻음이 없음도 없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필경에 얻음이라고 한다.
44. 이름하여 필경공
문: 어떤 것이 필경에 공입니까?
답: 공도 없고, 공이 없음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필경공이라고 한다.
45. 진여의 정
문: 어떤 것이 진여의 정(眞如定)입니까?
답: 정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정이라고 할 것이 없는 그것도 없는 이것을 이름하여 진여의 정이라고 한다. 경에 이르되 '정한 법이 있을 것이 없는 그것을 이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며, 또한 정한 법이 없는 것을 여래가 가히 설했다.다.'라고 하였다.
경에 이르되 '비록 공을 닦았으나 공으로써 증득함을 삼지 마라.'고 하였으니 공을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곧 이것이다. 비록 정을 닦았으나 정으로써 증득함을 삼지 아니하여 정이라고 하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다. 비록 깨끗함을 얻었으나 깨끗함으로 증득함을 삼지 않으니 깨끗하다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다. 만약 정을 얻고 깨끗함을 얻어서 일체 모든 곳에서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 무심함을 얻었다는 생각을 지으면 그것은 모두 망상이니 곧 속박당한 것으로 이를 해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음을 얻었을 때에 분명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재를 얻었으나 이것으로 증득함을 삼고자 하지 않으며, 또한 이와 같은 생각을 짓지 않으니 곧 이것을 참으로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경에 말하기를 '만약 정진한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은 망념이니 정진이 아니니라. 만약 능히 마음이 망령되지 않으면 정진도 끝이 있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46.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문: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답: 중간도 없고 또한 양변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양변입니까?
답: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 이것이 곧 양변이니라."
문: 어떤 것을 이 마음 저 마음이라고 합니까?
답: 밖으로 소리와 모양에 얽매이는 것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이 일으키는 것을 이 마음이라고 한다. 만약 저 밖으로 모든 소리와 모양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이름하여 저 마음이 없다고 하며, 안으로 망령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 마음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양변이 아니다.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을 때는 중간이 또한 어디에 있겠느냐. 이와 같이 얻었음을 이름하여 중도라고 하고, 참된 여래의 도라고 한다. 여래의 도라는 것은 곧 일체를 깨달은 사람의 해탈한 경계이다.
경에 이르되 '허공은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다. 모든 부처님 몸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체 색이 공함은 곧 일체 모든 곳에 무심함이며, 일체처에 무심함은 곧 일체색의 성품이 공함이다. 두 뜻이 다름이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색공이라 하고 또한 색이 법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일체처에서 무심을 여의면 보리, 해탈, 열반을 얻은 것이다. 적멸, 선정에서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일체처에서 무심이라고 하는 것은 곧 보리, 해탈, 열반을 닦는 것이니 적멸, 선정과 육도가 모두 견성하는 곳이라. 어째서인가? [금강경]에 이르되 '털끝만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47. 수기를 얻을 수 있는가
문: 만약 일체 모든 행을 닦아서 구족하여 성취하면 수기를 얻습니까?
답: 얻을 수 없느니라.
문: 만약 일체의 법을 닦지 아니하고서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얻을 수 없느니라.
문: 만약 이럴 때는 마땅히 무슨 법으로써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답: 행 있음을 쓰지도 않고 행 없음도 쓰지 않으면 곧 수기를 얻느니라. 왜냐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행의 성품과 모양이 모두 다 무상하다'고 하였으며,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행이 항상한 그러한 것은 없다.'고 하였셨느니라.
너희는 다만 일체처에 무심하면 곧 모든 행이 없으며, 또한 행이 없음도 없어서 곧 이것을 수기라 하느니라. 이른바 일체처에 무심이라 하는 것은 증애심이 없음이니 증애라고 말함은 좋은 일을 보고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이라 하고, 나쁜 일을 보고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사랑함이 없음이란 곧 물든 마음이 없음을 이름하나니 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요, 색의 성품이 공함이란 곧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이요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은 자연 해탈이니라.
- 노력하고 노력하라.-
너희들이 이것을 자세히 보아서 만약 뚜렷이 밝게 알지 못할 때엔 모름지기 빨리 물을 것이요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너희들이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닦아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내가 곧 종신토록 너희들을 위해 대지옥고를 받을 것이며, 내가 만약 너희들을 속인 사람이면 마땅히 내가 나는 곳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너희가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지런히 닦지 아니하면 내 알 바 아니니라.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 겁에 다시 돌이킬 수 없나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모름지기 합당히 알아야 할지니라.
- 한암대원선사 대주선사어록 강설(불광출판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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