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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큰스님 경책어구(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선사선담

by 노하시원 2022. 4. 8. 17:47

본문

O
어떤 때는 '화두에 일념이 모아져야 된다', '일념으로 지극히 해 가라' 하는데, 또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공부는 다 조작이다'라고 한다.  어떤 것이 옳은가? 왜 조작이라고 할까?

마음을 모은다는 것은 한다는 거다(유위 有爲). 심생즉종연생 심멸즉종연멸(心生卽種緣生 心滅卽種緣滅)이라. 마음이 나면 갖가지 인연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인연도 없어진다. 지어서 만드는 유위법은 결국 무너진다. 조작으로 만들어서 하는 건 안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짓는 거는 다 허망하다.  왜 이 말을 했는지 그 나머지는 여러분이 알아듣고 해결해야 된다. 해결이 안 되고, '조작이고 헛일이라면 뭘 어찌해야 진짜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가는 게 문제다.

그래서 남전스님이 말씀하길(평상심이도 공안),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것은 망각(妄覺)이요,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기(無記)라. 만약 의심하지 않는 도를 참으로 깨닫는다면 허공처럼 텅 비고 확연히 트여 있으니 어찌 가히 시비를 하겠느냐?" 무얼 지어서 만든다는 말인가? 이것은 절대 만들고 이루어서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을 했을때 알아듣고 깨달으면 된다. 깨달으면 "아! 이래서 이 말을 했구나!" 하고 안다.

"해야 할 게 없고, 만들 필요가 없고, 조작할 필요가 없다" 이 말에 계합(契合)이 되면 다 되는데, 그게 바로 안되면 차선책, 삼선책으로 눈을 부릅뜨고 천길 벼랑 끝에 섰을 때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것을 알려고 집중해서 밀어 붙여보는게 수행한다는 거다. 바로 못 깨달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차선책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깨닫게 된다. 그 깨닫게 되는 것이 일념으로 해 나가서  섭심(攝心 마음을 거둠), 응심(凝心 마음을 모음)한 그게 곧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일념으로 지극히 애쓰면 본래 조작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는 것이다.

O 머무르되 머무른 바 없는 것(無住)에는 지옥, 천당이 없다. 머무르는 곳에 지옥, 천당이 있다. 머무름이 없는(無住) 대무심의 세계는 공해서 텅텅 비어 있다. 확연히 밝은 것만 우주 대천세계를 덮고 있다.

O 여러분은 오랜 세월 동안 중생생활을 했기 때문에 본래자리에 돌아오는게 어렵다. 그러나 안 돌아올 수가 없다. 
찰나라도 화두를 잊어버리지 말고 해야 한다.
 
O 나는 본래 무엇일까를 참구할 때, ‘바로 이것이지’ 라거나 ‘본래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가면 안 돼요. 그건 다 망상이에요. 그런 생각이 안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면 그걸 따라가면 안 된다. 얼른 이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이 아니다는 부정을 하고 다시 무엇인고 하고 화두를 잡드려 나가야 돼. 계속 하다 보면 그게 익어진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한다고 하면, 오직 관세음보살 부르는 그 생각만이 순수하게 죽 이어져 나가야 되는데, 그게 끊어져버리고 들어오는 다른 생각, 그게 망상이다. 그 망상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거든. 그건 허망한 거지. 컴퓨터에 입력하면 저장돼 있듯이 우리 의식에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저장돼 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일념이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데 저장돼 있던 생각이 불쑥 일어나는 거다.  전부 망상이지. 내가 목전에 하고자 하는 일 외에 다른 게 스며들면 그건 다 망상이야.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 좋다 나쁘다 하고 드러나는 객관을 보고 알아차리는 놈(주체)이 있잖아. 그 실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건 망상이 아니다. 그건 망상과 관계 없는 것을 알면 해결이 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념 외에 다른 건 다 망상이다. 근데 그 일념을 돌이켜서 근본근원자리 마음을 찾아서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본래 망상이니 좋은 거니 나쁜 거니 그런 게 없다.  없는 그걸 알고 나니 평정이 되는 거다. 그때부터는 속지를 않아. 거울이 물건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 모양이 변하고 움직이나? 마음은 그와 같이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걸 알고 나면 ‘본래 허깨비고 실체가 없는 것에 내가 속았구나’ 하고 안다.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가지 않듯이, 망상 일어나는 걸 따라가지 않고 구경할 뿐이다. 본래 내 마음이 없는 자리, 그걸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하고 평정이 된다. 그렇게 무엇인고 하고 들여다 보면 자기 실체를 알게 돼 있어. 그걸 너무 오랫동안 안 해 보셔서 그래.

O 산에서 금맥을 계속 파고 들어가는 사람은 순금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나올 때까지 파고 들어가지, 그 옆에 잡석이 나오는 건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내가 무엇인고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 꾸준히 화두를 밀고 나갈 뿐이지, 다른 생각, 망상 일어나는 건 잡석같은 이물질인데 거기에 따라갈 필요가 뭐가 있는가 ? 그런데, 인식을 해도 확실하게 인식을 해버리면 공부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긴 하지만, 확실한 깨달음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따라 가는 게 아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은 이물질이라. 그 망상에 안 따라가는 거다. 빨리 알아차린다는 말은 순간 망상인 줄 알아차렸을 때 빨리 화두로 차고 나간다는 것이다. 금을 캐는 사람이 금은 안 나왔고 이상한 물질이 하나 나왔다 하자. 그러면 ‘이거는 아니다’ 하고 바로 금을 파고 들어가는 사람이 옳지, 그 이물질에 떨어져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자기 시간상 손해고 비생산적이다. 무엇인고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의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긍정을, 인정을 하지 말라. 다른 게 나오면 순간 빨리 알아차리라. 내가 금도 아닌 가짜 이물질에 떨어지면 안 되잖나. 바로바로 돌이켜서 차고 나간다. 무엇인고 하는 의심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놈이 무엇인고 할 때,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거라. 모든 게 아니라면 거기서 무엇일까 하는 의심이 나온다. 그게 바로 1초라도 빨리 향상일로로 나가게 되는 거지, 거기서 어물어물하고 다른 생각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된다. 

O 바닷물은 깨끗한 물만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더럽고 깨끗한 물이 들어오면 다 받아들여서 짠맛 하나를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지적했을 때,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거다. 그러면 내가 억울하지 않나 생각을 하는데, 그 문제는 시간이 가면 다 밝혀지고 사람들이 알아진다. 의식이 미혹한 미개인은 내가 잘못된 게 없는데 이러는 건 인권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고 별생각을 다 하고 ‘고발한다’ 이런 생각으로 발전이 된다. 다른 사람 잘못한 거까지 내가 뒤집어 쓰면 책임지고 해임 당하는데 누가 불이익을 받으려고 하나? 가급적 안했다는 걸로 변론하고, 억울하면 법에 고소하고 그렇지. 이건 인생 사는 게 아니라는 거다. 또, 잘못됐다 하는 걸 받아줘 놓고도 그걸 마음에 담아놓고 있는 사람이 많다. 무수히 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면 그건 짐이 되고 얼굴이 밝지 못하고 침울하고 근심걱정이 차 있다. 나중에 쌓이면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죽일까 어찌할까 별생각을 다 한다.  

의식이 밝고 차원이 높은 사람은 좋고 나쁜 걸 다 받아들이되, 받아들인 마음속에 흔적 자체가 없다. 그래서 화장을 안해도 얼굴이 달덩이처럼 빛난다.

마음에 흔적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마음을 알아야 된다.
허공에다 페인트칠을 하고 욕을 하고소리쳐도 허공에는 흔적이 없다.

내가 어제 법문에 ‘구덩이가 있으면 담기는데, 구덩이가 없으면 채우기가 어렵다’고 한데서 이걸 깨달을 수 있다.  

O  ‘이뭣고’는 나라는 존재 자체 이대로를 뭐냐 묻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요소가 모여서 한 뭉치가 되었다. 거기는 색의 요소, 생각의 요소 등 여러가지 요소가 섞여 있다. 그러한 한뭉치(一團之物) 이대로의 나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무엇인가?’로 참구하면, 몸뚱이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어서 따로 있는 그 놈이 뭐냐 하는 게 되는데, 이것은 바른 참구가 아니다.

육조스님이 남악 회양스님 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무슨(甚麽)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甚麽物 恁麽來 심마물 임마래)” 하였지, “‘이’ 무슨(是 甚麽)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하지 않았다. 이 시(是)자는 중국에서 지칭하는 생활용어일 뿐이다. 이미 앞에 뭐가 와 있기 때문에 따로 지칭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엇이냐?” 이거다. 나라는 이놈이 뭐지? 마음, 부처, 사람이라는 건 이름을 가짜로 붙인거지 본래 정해놓은 건 없다.  중도니 실상이니 자성청정이니 다 가짜 이름이고 소용이 없다.  다 치우고 진짜 너가 뭐냐? 거기에 대적하려니 딱 끊어지고 캄캄해 말을 할 수가 없다.

전연 몰라야 된다. 망연자실해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다.
백척간두인 것이다. 回頭看(회두간) 머리를 돌이켜 보라. 밖으로 향해서 찾지 말고 돌이켜서 나라는 자체를 보고 뭐지? 하라는 말이다. 자문자답하는 거다. 이놈이 뭐냐? 진짜 나는 뭐냐? 진짜 나를 소개해야 되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히 한마디 해야 한다. 한마디가 꼭 필요하다.

O 다른 일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눈앞의 일이 해결되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가 깨달아 계합이 되니 하루 저물도록 같이 있어도 서로 말이 없더라고 했다. 말이 필요없이 의중에 맞춰서 눈앞의 일을 척척 해 버리기 때문이다. 눈 마주치면 다 됐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O 불이(不二) 법문에 들어가는 법을 물으니, 문수보살은 ‘말로 할 수가 없고 모든 문답을 떠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하였고, 유마거사는 묵연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해도 때리고, 침묵해도 때리겠다” 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O 간택, 취사심을 가지고 따라가서는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다. 썩은 고목나무, 돌장승처럼 되어야 자기집 소식에 가깝다. 그러지 않고 사량으로 아는 걸로는 안된다. 물을 먹어야 하는데 ‘술 가지고 와’ 라고 잘못 말했어도, 통해서 계합이 된 사람은 술이 아닌 물을 가지고 간다.

O 백척간두는 극칙(極則)을 말한다. 세속에서는 클라이막스(Climax), 오르가즘(Orgasm)이라고 한다. 화두를 할 때, 그 알 수 없는 의정이 한뭉치가 되어서 깊은 일념삼매가 깊어져서 더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 자리가 클라이막스이다.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進一步) 뒤집어 엎으면 다시 살아난 상태가 곧 깨달음이다. 거긴 무한한 법의 기쁨(法悅), 법의 오르가즘이 있다. 세속에서 유한한 색신 몸뚱이 가지고 찰나적으로 클라이막스, 오르가즘이라고 하지만 생사 고통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법의 세계에서 클라이막스에 올라간 깨달음의 기쁨, 법의 희열과 충만은 말로 어떻다라고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역대 조사들이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하였다.

백척간두에 올라가 보라! 다 놓고 오직 알 수 없는 이게 뭔가 하고 극치까지 올라가 보라! 그래서 법의 오르가즘(법열)을 느껴보라! 그래야 역대 조사들이 한마디 하듯 척척 한마디가 나올 것 아닌가!

O 조주스님께 묻되, “어떻게 해야 망상을 없앨수 있습니까? ”하니, “망상을 없애서 뭣 하려는가? ”  

세간과 출세간에서 흔히 “오직 할 뿐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과연 업으로 입력이 되는가 안되는가가 공부인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주로 관법에서 ‘볼 뿐이고 먹을 뿐, 딴 망상을 하지마라.’ 이러는데 거의 여기서 속기 쉽다. 그것은 공부의 한 과정이지 전부 옳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 한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병이고 간택이다.

O 이 목숨 마치고 갈 때도 ‘무엇인고’ 하고 갈 수 있는 힘을 길러라. 찰나가 아깝고 시급하다. 생사고의 파도 속에 있는데 빨리 헤어나는 최상책이 화두이다.

O 누군가 나에게 와서 묻되
“아직 기반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을 간화선에서는 단박에 깨치도록 해 준다니, 그것이 됩니까?”
“그래. 단박에 된다.”
“어떻게 됩니까?”
“"쇠나무에 꽃이 피었다(鐵樹開花 철수개화)" 하면 그대는 이 뜻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지관법이나 관법으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건 그대가 생각으로 아는 것이 미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이 미치는 지식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체가 망상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지요.”
“그러면 ‘쇠나무에 꽃이 핀다’거나 ‘해골 속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난다’ 하면 그걸 알겠나?”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일체 아는 망상이 당장에 끊어졌네! 지금 모른다고 했지 않나?”
그때서야 “아하!” 한다.
“그대가 아는 것 가지고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그 아는 걸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대는 모르지 않나? 이렇게 중생이 아는 것을 단박에 싹 없애 주었네.
또,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 라고 한 그건 아는가?”
“모릅니다.”
“모르겠지? 이렇게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일체 번뇌망상을 단박에 끊어줬으니 이 얼마나 빠른가!”
“아~! 깨닫지는 못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다.”

단박에 무엇인가? 무엇인가에 가서는 한마디로 일체가 딱 끊어져버린다.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생각으로 미치는 거는 아니다.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우주 만천하의 별별 이름을 다 갖다 대도 아니라. 어떤 것도 붙일 수가 없다. 그래서 무엇이냐 묻는 거다.

‘모르는 이것이다'’모르는 걸 아는 이것이다’ 하고 다 됐다 하면 안되고, 모르는 그 부분을 지극히 의문점을 가지고 깊이 참구해 들어가서 깨달아서 확실히 알아야 한다.
 
O 이 법은 중생의 의식을 가지고 측량할 수 없다. 중생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거라면 별 것 없는 게 아니겠나. 법의 인연을 심는게 중요하다. 못 알아 들어도 이 법을 듣는 사람과 안 듣는 사람은 천지차이다. 이 법에 들어올 수 있는 인연이라도 심어놨기 때문에 공부를 해봐야겠다, 세상은 무상하구나, 영원한 것은 있는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듣더라도 법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해줘야 한다. 이야기 해주는 건 허물이 없다. 들은 사람이 올바른 씨앗이 되어서 인연이 된다.
 
O 중생의 마음 자체는 두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생이 세워놓은 법칙과 법칙 아닌 것-그걸 가지고 옳다 그르다 하고 스스로 허물을 짊어지고 있다. 뭘 가지고 옳다 그르다 하는지 확실히 댈 근거도 없다. 그런 형식적인 상식, 지식을 오래 담아 놓고 있다가 그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와서 ‘이게 맞지 않느냐!’ 하고 다투고 시비한다.
 
大死却活(대사각활)! 크게 죽어야 살아난다. 크게 죽지 않으면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
 
내가 내 자신에게 속고 있는데 뭘 바로 보겠는가?
 
하심하는 속에서 업이 녹아나고, 공부할 수 있는 발심이 되고 신심이 난다. 하심이 없으면 도심도, 분심도, 신심도 안 난다. 
‘나는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내려놓고 일념으로 공부를 하는 게 참 중요하다.
 
간화선은 고봉 정상에서 시작하는 거다. 관법으로 이뭣고 하는데까지 오려면 수억겁을 닦아야 된다. 
 
 
O
[대중] 평소 숨을 쉬는 걸 보는 수식관을 혼자서 하고 있는데 확신이 잘 안 섭니다.

[스님] 집중적으로 깊이 주시를 해야지. 깊어지고 커질수록 마음의 복잡하고 산란한 것이 쉬어진다. 그걸 맛을 봤는가?

[대중] 깊은 체험은 못 해봤습니다.

[스님] 간화선에서는 숨 쉬고 내쉬는 걸 보는 것이 아니고, 숨 쉬고 내쉬는 놈, 숨 쉴 줄도 알고 내쉴 줄도 아는 그 놈이 무엇인가 하고 돌이켜서 관조하는데, 이 놈이 무엇일까 하는 의심을 붙여서 참구해 본다는 그것이 다르지. 
숨 쉬고 내쉬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가? 뭐가 이렇게 숨을 내쉬기도 하고 들이쉬기도 하는 건가? 
그걸 나라고 해도 안맞고, 나가 아니라 해도 맞지 않다. 그럼 무엇이냐 이거다. 거기서 열심히 하면 근본적으로 깨달아서 해 마치는 것이 되고, 그냥 숨 쉬고 내쉬는 걸 보는 것은 깨닫는 것은 없다. 그걸 잘 알아야 된다. 알겠지? 그건 분명한 거다.
 
 
 
O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화두가 되면 되는 것을 알고, 안되면 안되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말을 들을때 상상근기는 대번에 깨닫는다.

'마음수련 명상센터'라는 데서는 "일어나는 생각을 버려라, "나를 (생각으로) 죽이라. 그러면 나를 괴롭히는 것도 없어진다"라고 가르치는데, 그렇게 해서 본분자리를 깨달아 해탈하는 것은 안된다. 그렇게 해서 된 사람이 없다. 사람을 잘못 가르치고 버리는 것이다.


O
[질문]
공부하려고 하면, 자꾸 망상이 나고 졸음이 오는데 어쩝니까?
[답변]
공부하다 일어나는 그런 문제의 모습을 본인이 보고 안다는 거다.
그래서 자꾸 공부하는 건데, 본래부터 잠 자는 물건이고, 본래부터 망상인 것 같으면 공부할 필요가 뭐 있어? 계속 잠으로 망상으로 살아가야지.
그런데 그건 아니란 말이야.
망상 아닌 놈이 있어. 잠이 왔지만 잠이 아닌 놈이 있다. 그러니 역력히 알지.
본래 잠 안 오는 놈이 있기 때문에 잠 오는 것을 알고, 본래 망상 아닌 놈이 있기 때문에 망상이 나는 줄 안다 이거다.
공부해 들어가면서 그걸 깨닫는 거다.
본인이 가만히 공부해 보면 아하! 하고 발명(發明)하는 게 있다. 그건 완벽하고 영원하다. 그건 지식이 아니다.
('18.8.19 대원큰스님)
 
O
 
[대중] 제가 어제부터 그거에 대해 고민을 좀 많이 했는데 못 찾았습니다.
[스님] 못 찾았지? 깊이 고민해 들어가 보니까 그렇지? 고민해 들어가면 마구 잡된 생각이 많이 일어나지? 일어나는 그거를 본인이 앉아서 확인을 해봤잖아. 자기 내면세계에 복잡한 소요사태가 일어난 걸 봤잖아.
나의 세계, 내 마음의 세계에 이렇게 불안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구나. 그것이 있어가지고 우리가 불행한 거라. 행복은 편하고 괴로움이 없다는 거고, 불행은 불안한 고통이 많다는 거다. 근본적으로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나한테 있는 잡된 번뇌망상의 그 무서운 도적을 없애 치워야 되는데, 없애 치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나는 뭔가 하고 날 들여다 보라. 나는 어떤 물건인가? 본래부터 내가 괴로운 물건인가, 안 그러면 나는 본래부터 편안한 물건인가? 이게 어떤 물건인가 하고 깊이깊이 나를 추구해서 들어가면 거기에서 번뇌망상 잡된 생각이 없어져요. 왜 없어질까요? 집중하는 일념, 독서삼매란 말 들어봤어요? 재밌는 책을 보면 거기 빠져서 시간 가는 걸 모르고 점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저녁 밥 할 생각도 잊어버린다. 한 곳에 깊이 빠져 들어가 버리면 시간을 초월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일까 하고 깊이 참구해 가는 일념이 집중해 들어가다 보면 하루가 가는 걸 모를 때가 있다. 굉장한 거야. 일념이 깊어진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바깥으로 하루를 서 있어도 괴롭고 피곤하고 아픈 걸 싹 잊어버리고 모른다. 거기에 일체 번뇌망상도 다 없어진다. 그게 약이라.
우리가 감기약을 먹으면 몸 속에 약이 골고루 퍼져가지고, 거기서 약 기운이 밖으로 드러나서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것과 같이, 무엇인고를 자꾸자꾸 하면 약을 먹으면 감기가 낫듯이 우리의 번뇌망상, 잡된 생각, 불안한 마음 이런 것이 싹 청산돼서 없어진다.
무엇인고 하는 집중하는 그게 약을 먹는 거라. 달마 스님이 9년간의 벽을 보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 딴 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걸 한 거예요. 
그게 우리 인생을 행복하고 영원히 만족하게 만들어주는 비방약이라. 
 

O
남아도는 여백시간이 있을 때 골프 치고 놀러 다니고 쇼핑 다니고 산천경계 구경 다니며 시간을 보내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나는 무엇인가 돌이켜 보십시오. 여백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일체처 일체시에 다 이뭣고이지 다른 것이 없다 하는 정도는 대단한 차원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일체 생활 속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화두가 되니 안되니 끊어지니 이런 말 안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일부러 조작으로 아니해도 이뭣고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간다는 걸 바로 보고 깨달아 알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 듣고 이해하고 인식을 해서, ‘그렇구나! 이놈이 일체를 하니까 이놈이 그놈이고 다르지 않지. 전부 바로 이놈이지.’ 이렇게 아는 걸로 뭘 하려고 하면 경계에 부딪히면 그만 막히고 안 됩니다. 그렇게 인식해서 알아지는 거는 소용이 없고 확실히 깨달아서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화두를 도망 못 가게 잡아 쥐려고 하니까 안되는 건데, 그걸 돌이켜서 일체 만 가지를 섭(涉)하는 이놈은 모든 경계와는 관계가 없음을 바로 보고 깨달아서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았을 때 뭐냐고 물으면 바른 대답이 나옵니다.



[대중] 화두 의심이 잘 안 들어가집니다.

[스님] 그게 바로 도둑놈이 하는 소리라. 그 생각이 바로 망상 도둑놈이에요. '안된다' 이런 생각을 나게 해가지고 못하게끔 만들어요. 거기 속으면 안돼요. '이건 아니다. 내가 도둑놈한테 속으면 안되지' 하고 얼른 이뭣고 하고 순간포착해서 빨리 낚아채라는 겁니다. 알겠어요?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 끄달리지 말아야 돼요. 자기 안에 있는 8식의 마왕이 '나는 왜 의심이 안 나나?'하는 생각을 침투시켜요. 그게 발단이 돼서 '안하면 어때. 그냥 지나가지 뭐', '어려운 거 그만 치우자' 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이 일어나요. 왜 선방에서 공부하다 중간에 걸망지고 도망가겠습니까? 그게 망상에 끄달려 가는 겁니다. 그렇게 가서 공부가 되느냐? 공부 안 되거든요. 속은 겁니다.



불성의 세계를 깨달아 아는 분은 일체 모든 것을 볼 때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으로 확실히 압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을 모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여몽환포영을 글로만 봤기 때문에 그 다음에 가서 물으면 다 잊어버리고 ‘또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이러지요.

깨달음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현실이 꿈인데, 중생들은 꿈인 줄 모르고 생시(生時)라고 하고 있습니다. 밤에 잠잘 때 꿈을 꾸면 꿈 속에서는 확실히 생시입니다. 그렇지요? 그냥 무서운 게 나타나면 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지르고 그러잖아요.
꿈 꿀 때, ‘이건 꿈이다!’ 하고 알면 공포도 없고 바로 깨어버립니다.

또, 정말로 화두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꿈에 귀신한테 쫓긴다던지 이상한 물체에 끄달려 고통을 받을 때, 거기에 안 끄달리고 화두를 돌이켜 참구하는 마음을 내면 대번 깨어버리고 그게 없습니다. 그때 얼른 화두를 돌이킬 수 있다면 공부가 많이 된 사람입니다. 그게 여간 해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걸 못하고 끝까지 꿈에 시달립니다.

꿈을 깨고 나면 ‘생시인줄 알았더니 꿈이네’ 하고 꿈이라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 자기한테 일어나는 걸 본인들은 다 알고 있다. 화두가 끊어지고 안 되는 줄 알고, 번뇌망상이 찰나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무수한 경계들이 일어나는 걸 본인들은 보고 있어서 안다.

그러면서 왜 급한 줄 느끼지 못할까?
중생이 익힌 업의 마음이 너무 커서, 그게 더 무거워서 그리로 쓰러지는 것이다.

실제 본인의 몸에 불이 붙었다면 그때에 처한 심정이 어떻겠나? 아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려고 뛰쳐나갈거다. 자기한테 번뇌망상 일어나는 걸 보고 급하고 급한 마음을 일으킬 줄 안다면 화두가 일사천리로 된다. 그것만이 사는 거니까. 번뇌망상의 불길의 강을 벗어날 어떤 방법도 길도 없다. 한가닥 이 길 뿐이다.


뭐가 나타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 사람이 그런 걸 봐 가지고 진정 자신이 알아야 할 도(道)를 바로 알았는 것이냐? 십만팔천리로 거리가 멀고 아무것도 아니다.

본인은 어떤 모양의 한계가 지어져 있는 걸 본 것인데, 한계가 지어진 걸 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봤다고 해도 그건 진실성이 아니라 헛것이다. 진정한 참 진리의 도는 어떤 한계를 지어서 볼 수가 없다.

금강경에 모양이나 음성으로는 진실한 도를 볼 수 없다 했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부처님은 일체유위법에 대해서 있다, 없다로 말씀하지 않았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다)이라고 말씀하셨다.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멋지게 하신 것이다. 어느 한 곳에 치우쳐서 말하면 허물이 된다. 그 차원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역대 조사들은 또한 구모토각(龜毛兎角 거북이털 토끼뿔)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진정한 출가는 본분사(本分事)를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가사만 입었다고 해서 출가라고 할 수가 없다. 공부를 해서 자기의 본분사가 해결이 된 사람이 참으로 출가한 사람이다.

출가는 삼계를 뛰어났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공부가 제대로 해결이 안됐으니 삼계 속에 계속 넘어졌다 일어났다 헤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온 18계(육근,육경,육식)라는 이 집에서 벗어나야 출가다.

O

무엇인고를 할 때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일체 아니라서 싹 쓸어버리고, 그 근본으로 돌아가서 그걸 가만히 깊이 들여다보는데, 따로 의심이 막 일어나는 걸 생각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 본인이 궁금하잖아? 그래서 ‘전부 다 아니라면 그럼 무엇인가?’ 안으로 깊이깊이 생각해서 참구해 보는 걸 ‘의심’이라고 하는 건데, “나는 의심이 불길처럼 확 일어나지 않아요. 어쩌지요?” 자꾸 이러면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의심이 따로 있는 줄 알지만 그건 아니에요. 본인이 궁금해서 참구하는 자체를 그냥 의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의심해서 자기를 봐서 일체가 없는 줄 바로 아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중도를 잘 취해서 이 세상에서 생산적으로 멋진 물건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아는 걸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煇猷)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
신광(神光)이 매하지 아니하여 만고에 빛나니
이 문중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자기의 모양을 확실히 진짜로 바로 알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상식으로 조그마한 걸 담아놓고 옮기려고 하면, 그 사람은 시시비비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거기에 말려들어가야 되고, 고통속에서 계속 쳇바퀴 돌듯 돌면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세존께서 라후라존자에게 종을 치라고 하고서 아난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난아! 너는 저 종소리를 들었느냐?”
“듣지 못했습니다.”
“아난아! 소리가 났다가 소리가 없어진다면 이것은 성진(聲塵 소리의 티끌)이니라. 종소리를 듣는 성품이 어찌 저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소리에 따라가겠느냐?”
그때 아난존자는 본래 듣는 성품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바다의 파도나 거품이 일어나고 꺼지지만, 바다밑에 들어가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이 없듯이, 소리가 일어나고 없어지더라도,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성품자리를 깨달아 알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고?' 할 때는,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인고?' 한다 이거예요.
만약에 호리라도 이거라고 정해졌다면 ‘무엇인고?’ 할 필요가 없겠지요. 싹 쓸어버렸는데, 무엇이냐고 할 때는 뭐라고 해야 돼요? 거기서 확실히 깨달아야 됩니다. 깨닫고 나면 그때는 쓰는 게 달라집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걸음 나아가야 됩니다.

얼른 뭘 구하려고 하고, 뭐가 환희 터지는 게 있을 거다, 뭐가 확 보이는 게 있겠지 하는 허망한 생각으로 왜 참선을 하느냐는 거예요. 뭐가 확 열리고 깨지는 게 있을 거다는 이런 생각 가지고 공부하고 있으면 천만년 가도 안 돼요. 그런 게 아니라요.

얼른 부처가 되는 걸 바라지 말고, 자기 본래 이 자리는 부처도 조사도 성인도 신도 아닌 데서 밖으로 행하는데 따라서 두 가지 길로 나눠져요. 본래 부처도 성인도 신도 아니고 일체 모든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거품도 아니요 파도도 아니라. 구름이 허공에서 일어났지만 일어난 바가 없다. 여러분의 본래 마음자리를 들여다 보니 마음자리가 본래 실체가 없고 허공처럼 텅텅 비어 있어서 그 자리가 이렇다 라고 딱 정해진 바가 없더라 이거예요. 부처도, 조사도, 일체가 아니다 는 말이지요.

일체가 아닌데, 거둬들여 바로 알은 사람이 밖으로 한 발자국 실천에 옮기는 데 따라서 갈라져요. 그 자리를 바로 알은 사람은 범부 중생처럼 좋지 못한 행을 안 한다는 겁니다. 왜냐? 자기 손해인데? 인과가 분명한 건데? 그래서 밖으로 옮길 때 부처와 같은 행을 옮긴다는 거예요.

O

[스님] 아니 아니야. 분명히 의지가 통하면 거기에 대한 대응책이 대답이 나와요. 그런데, ‘죽으면 죽었지 내가 너한테 혀가 끊어져도 말해줄 수 없다’ 이 말에 왜 깨달았을까요?
[대중6] 저는 ‘목 마른 자 대신해서 물을 먹어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스님] 물론 그런 뜻도 있긴 있지만, 말해줄 수 없다는 데 대해서 깨달은 그것이 뭐냐 이거예요.
[대중1] 말과 설명을 들어서 해결해 보겠다는 그 중생심이 순간적으로 끊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닌 진리의 실체를 그 자리에서 바로 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스님] 말과 언어행동 모든 게 끊어진 실체에 대한 걸 깨달았다?
[대중1] 예.
[스님] 선문에서는 그런 걸 설명이라고 하는 건데요. 그런 걸 설명을 하면 어긋난다는 거라요. 설명을 하는 거는 그게 벌써 여러분의 사량분별 생각이 미쳤단 소리거든. 그건 안 되는 거라요. 그래서 설명을 하지마라. 선문답 할 때, 보수스님이나 조주스님이 설명을 했어요? 안 했잖아요. 그게 중요하다 이거라요. 거기에서 확실히 계합해서 깨달은 사람은 그런 설명을 많이 하고 이러는 게 아니고, 특출한 안목의 행동이 나와요. 조주스님이 했는 걸 누가 흠집 안 잡잖아요. 그와 같이 행이 나오는 거라. 그렇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설명을 하고 이야기하고 이러는데, 그렇게 하는 걸 ‘합리주의’라고 그래. 합리주의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이거는. 혀가 끊어져도 말을 못해준다는 그 말에 여러분이 계합이 돼 깨달았다면, 거기에 대한 걸 이야기 하고 설명 백 번 해봐야 안 맞는 걸 알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응책이 별따로 특별하게 나와요. 그게 중요한 거라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게 선가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보수스님 조주스님처럼 서로 말 안 해도 척척 맞아 들어가는 그게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도 그걸 하려고, 그렇게 살려고 여기 와서 공부하는 거라요. 그렇지요?
[대중들] 예.
[스님] 그래 열심히 정진하시오. 마칩시다. 새로 오신 분 누가 있어요? 없지요? 마치지. 어쨌든 일초라도 화두를 놓치지 말아요. 일초라도.

O 불교가 무엇이냐?
불심(佛心)을 행하는 것이 불교다.
불심(佛心)을 행하는 게 잘 안 되는 원인이 뭐냐?
나에게 번뇌망상의 도적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안 된다.
그걸 어떻게 항복 받아서 없애치우느냐?
‘나는 무엇인가’ 반문해서 지극히 화두를 참구해 들어갈 때 모든 걸 해결한다.

O
부처의 마음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상의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어디 부딪히면 그만 부처의 마음이 없어지고 고약한 생각이 탁 튀어나온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중생을 알면 바로 부처를 안다는 말이 있다.
중생을 보고 중생이라는 게 어떤 거라는 걸 안다. ‘이게 중생이구나’
그러면 중생과 부처는 두 바퀴의 수레바퀴와 같아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같이 다닌다.
‘중생’하면 그 뒤에 바로 ‘부처’라는 말이 따라간다. 숨어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그래서 중생이 이런 것이다 알 때 그 반대의 부처를 알아차렸다는 말이다.

무엇인고 하다가 망상이 톡 튀어나올 때, 망상에 따라가서 침체되어 빠지는 게 아니고,
망상할 때 망상인 줄 알아차리는 놈을 퍼뜩 알아차려 보니까 망상이 아닌 게 망상이라 하거든.
그걸 알아차렸다는 소리라. 망상할 때 망상 아닌 놈을 알아차렸다는 거야.
볼펜이라고 할 때 볼펜 아닌 놈이 볼펜이라고 했다 이 소리라. 그걸 바로 알아차렸다는 거다.

그러면 ‘이뭣고?’ ‘왜 뜰 앞의 잣나무라 했는가?’ ‘왜 無라 했는가?’에서 뭘 깨닫느냐? 분명히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이 있다는 걸 여러분은 상상을 하는데, 뭐가 확 무너지고 확 터져서 확 깨지는 이런 상상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배워서 익혀서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알아버리는 건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밝다.
확실히 알아차리면 의심할 게 없다. 확연하다.

그래서 화두를 지극히 밀고 나갈 때는 삼매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일념으로 집중해서 해 들어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삼매에 들어간다.
선정 삼매에 들어가는 속에서 성성(惺惺)해야 알아차림이 있다.
거기서 혼혼(昏昏)하게, 고요하게 침체 돼 졸면 안 된다.
거기서 성성해야 알아차림이 있다. 그건 아주 분명하다.
내가 해봤기 때문에 아는 거다. 성성하지 않으면 알아차림이 없다.

O
[대원스님] 그래, 보살님이 밭에 가서 호미로 풀을 뽑으면서 "왜 이래 풀이 자꾸 많이 나오지?" 하면 그게 되는가요?
[대중] 안 됩니다.
[대원스님] 풀을 뽑아 나가는데 전력해야지, 생각이 자기가 뽑으면서 ‘왜 풀이 자꾸 나오지’ 그걸 따라가면 되나? 보살님이 나는 무엇인고라는 화두를 일념으로 하는 그놈이 호미라. 그 호미를 들고 풀을 뽑아내듯이 망상이 밖으로 뽑혀 나가느라고 나오는 건데, 그거를 자꾸 왜 시비하고 생각할 게 뭐 있어요?
지금 보살님 뭔고 하는 그놈이 망상을 뽑아내느라고 망상이 드러나는 거라. 망상이 드러나는 걸 놔두지, 뭘 자꾸 시비하고 왜 나오는가 하고 걱정할 거 뭐 있어? 그거 놔둬야 돼. 놔두고 자꾸 반대로 무엇인가 그 화두만 집중해서 공략해 들어가야 돼. 그러면 열심히 해놓으면 많이 하는 것만큼 망상이 많이 나와요. 왜냐하면 많이 뽑혀 나가느라고 나오는 거니까 그걸 자꾸 시비하고 생각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거라. 화두를 안 하고 놀면 또 망상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고요히 앉아서 생각하고 화두를 해보니까 망상이 나오는 것도 알았지. 화두 일념 하는 그놈에 의해서 망상이 뽑혀 나간다. 그러니까 자꾸 열심히 화두만 참구하면 돼요.

O
이것을 생각으로 구하려고 하면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알려고 하면 더욱 몰라지고 사량분별로 이치를 따지면 더욱 막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바로 보고 알면 된다.
별따로 뭘 구하고 깨달으려고 하면 없는 걸 억지로 만들려고 하는 격이 된다.
허공을 아무리 손으로 파본들 흔적이 있는가?
여기서 바로 해결돼야 된다.

O 이 시간이 소중한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아주 긴박하고 급박한 그런 자리다.

여기서 한만하게, '나야 오늘 참석했다가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지나가면 그만이지' 이래 한만하게 생각할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한만하게 여러분이 정신 안 차리고 그냥 지나간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수 천리 낭떠러지 밑으로, 지옥 속으로 떨어지게 하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르잖는가. 자신이 깊은 지옥 속으로, 다시 나오지도 못할 흑암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신세를 여러분이 못 느끼잖는가. 그러니까 한만하지. 그냥 가만히 듣고 '모르면 그만이지', '알면 그만이고' 그러고 마는 거다.

 
O [스님] 그래요. 선방에 다니면서 공부를 해봤어요? 안 그러면 처음이요?
[대중] 템플스테이는 많이 다녔고요. 근데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딱 걸린 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지금 큰일 났습니다.
[스님] 완전히 걸렸어요? 걸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생이 그리 돼있어요. 안 걸리게 사는 건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고. 이거를 해결하자면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걸리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내가 뛰어나느냐 죽느냐 달려있어요. 가장 중요한 그런 순간이에요.
[대중] 그래서 스님이 걸리게 하셨으니까, 스님이 푹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거는 아무리 풀어주려 해도, 똥을 대리로 누어줄 수 있어요? 밥을 대리로 먹어줄 수 있어요? 숨을 다른 사람이 대리로 쉬어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숨을 대리로 쉬어줄 수 있으면, 숨 안 쉬고 죽었어도 다른 사람이 쉬면 계속 살아있을 텐데, 안 되잖아요. 남이 해줄 수 있는 게 있고 해줄 수 없는 게 있어요. 해줄 수 없는 그 점은 내가 해결해야 돼요.
[대중] 그러면 스님한테 도움을 부탁드리는데, 제가 지금 제 마음을 보니까, 꼼짝 달싹 못하는 마음이 하나 있고, 스님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두 가지 상태가 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여기서 또 한 걸음을 나가야 될지요?
[스님] 그래, 그 두 개를 방금 말한 그놈은 무엇이겠어요? 꼼짝 달싹 못하는 물건인가, 안 그러면 환히 또 밝아졌다 하는 마음인가? 그 두 가지를 말했는데 그대는 어떤 것이오?
[대중] 걸리지 않는 마음에서는 전혀 자유롭습니다. 
[스님] 지금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어디에서 걸리지 않는 거를 봤는가요?
[대중] 떠난 적이 없어서 도착할 곳도 없는 거기서 본 것 같습니다.
[스님] 그렇다면 그건 거리가 먼 말인데.
[대중] 그러니까 한 말씀 해주시길...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스님] 빠져나가게끔 해주는 얘기는 본인이 해결이 안 됐으니까는 다시 해봐야 되지. 내가 해 주는 거를 바라지 말고.
[대중]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방법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스님] 지금 그대가 밝다고 말했는 거와 꼼짝달싹하지도 못했다 하는 두 가지를 말했잖아요? 그 두 가지 가운데 그대는 어떤 물건이냐 내가 물었어. 그러니 밝다고 말했거든? '그건 아니다. 그럼 너는 어디서 그걸 봤느냐?' 물었다. 내가 정리해 주는 거라. 깨닫게끔 해주는 거라. 해주는데 자꾸 날 보고 다시 해달라고 이러는데, 왜 지금 해주는 이야기에서 그걸 못 살펴보고, 또 "나를 다시 깨닫게 뛰어나갈 수 있는 말을 해주시오" 하는데. 계속 해주잖아. 내가 해주고 있잖아. 해주고 있는데도 지금 본인이 왜 안되느냐 이 말이라. 

분명히 그랬잖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걸려 있다, 또 어떨 때는 밝다. 그러면 그 둘 중에 그대는 어느 곳에 처해 있느냐 그러니까 밝은 데 처해 있다고 그랬어. 그래서 그건 아니다. 그럼 그건 어디서 봤다고 봤느냐 그러니까는 떨어지지도 않고 안 떨어지지도 않는데도 봤다. 그건 그래도 거리가 멀다. 그건 다 아니니까 다시 깊이 참구해 보라. 무엇인가?
(2022.11.06 대원스님 소참)
 
O 누가 이뭣고를 붙들고 있으라 했어? 
그건 아니여. 
'뭐냐?' 이거는 마지막으로 딱 깨주는 소리야.
깨주는 거기 가서 깨달아야 돼요.
'너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야.'
그러니까 사량분별, 이치, 이름, 모든 일체가 탁 끊어져 붙일 수가 없어.
'뭐냐?' 바로 그거는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을 해준 건데, 뭔고 그걸 붙들고 끌어안고 있다니까.
그걸 왜 붙들고 끌어안고 있어? 붙들고 끌어안고 있어야 아무 소용도 없는 건데.
깨달아야지. 깨달아야 된단 말이요. 
('23.1.1 대원스님 소참)
 

 
[스님] 무상(無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중] 제 소견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님 법문 듣고, 보리다라 존자의 법 전수 과정에 일어나는 모든 거를 듣고 일어난 소견인데, 그 무상이라는 거는 불기무상(不起無相)이라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 무상이다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알고 있는 무상은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인데, 그 실상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데, 일어나지 않은 그 실체가 무엇이냐, 깨달음을 갈구하는 이 중생들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그 무언가가 실상이면서 불성이면서 우리가 화두라는 열쇠를 가지고 찾아가는 그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현상이죠. 그 현상은 실상에 찾아가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인 것이거나 의식적인 것이거나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인데, 부처님 가르침으로는 본각이 시각(本覺卽始覺)이라 이런 말씀이 화엄경에 있는데, 그 본각(本覺)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모든 중생들 마음속에도 가지고 있는 본원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모르기 때문에 시각(始覺)을 통해서, 그러니까 이 화두라는 열쇠를 가지고 딱 부닥치는 그 시각(始覺)의 순간에 일어나는 게 우리들 불성이 아닌가. 그러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무상의 세계를 찾아서 가는 길이 이 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님] 지금 방금 책자나 경전을 보신 걸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지금 실상, 본각이라고 하는 그걸 상상으로 그게 있다는 걸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대중] 네. 

[스님]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생각을 하면서 그리 말씀하잖아요? 

[대중] 네.

[스님] 그런데, "실상과 본각이 어떤 겁니까?" 하니까, 이것(볼펜)을 들어 보여주면서 "볼펜이지." 이랬어요. 
  보살님은 본각이다 시각이다 불성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무한대하다는 걸 상상을 하고, 그걸 지금 생각하면서 말하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무한대한 성품과 본각이나 실상이나 미묘법이라 하는 게 어떤 겁니까?” 하니까 "이 볼펜이지." 이랬어요. 왜 그랬을까요?

[대중] 스님 말씀하시는 "이게 볼펜이지" 한 거를 지금 제 소견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영취산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시니 염화미소를 지었다는 그런 경지가 도대체 뭔가 하는 그 의정이 일어날 뿐, 왜 볼펜을 들었는지는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님] 그런데, "어떤 것이 본래성품입니까?" 그러면 과거에 조사스님들이 전해 내려오는 걸로서는 지금 이런 인도의 조사스님들 전법게에 나오듯이 그렇게 말씀을 잘해 줍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후대 학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좀 문제가 생기겠다 해서 중국의 조사스님들은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리 하지 않고 "어떤 것이 성품입니까?" 그러면, "오온(五蘊)."이라고 했습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대답했거든요.   
  또, "어떤 것이 미묘법의 실상이요 본성입니까?" 하니, "볼펜이지." 이랬어요. 이게 참 기묘한 겁니다.
  이걸 알아들을 줄 알면 여러분이 상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안목이 열린 사람이라고 봐야 돼요. 그러기 전에는 항상 여러분은 상상합니다. 자성, 본성, 본각, 불성, 그건 우리 인간이 생각으로 알 수 없고, 미치지도 못하고, 말로 형용을 할 수도 없고, 불가사의해서 무한대하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아 그게 그렇구나' 듣고 그걸 담아놓고 상상을 해요. '무한대하구나. 말할 수 없는 거다.' 여러분이 다 그렇지요? 그래 되면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지 않습니까?
  "조사가 온 뜻이 뭡니까?“ "뜰 앞에 잣나무니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실상이요 본성입니까?" "볼펜이다.“ 여기 가서 보면 여러분이 유구무언이라.
  오늘 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주는 겁니다. 이걸 듣고 여러분이 척하니 열리면 되는 거고, 안 열리면 어쩔 수가 없이 또 참구를 해 봐야 돼요. 
  무상(無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요.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심(無心) 무아(無我) 다 마찬가지예요.
  "어떤 것이 무심이고 무주고 무아입니까?" 그러면 ‘모양이 없는 건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지?’ 하고 딱 길이 막히잖아요. 그렇지요?
  금강경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한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이제 이걸 말로 얘기를 해주면 또 그걸 들어가지고 입력해서 상상해요. '그건 그렇구나' 이래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 다음에는 전혀 모르는 거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3세심 불가득이라고 하는 것도 왜 불가득이라고 하느냐? 여러분이 맨날 입에 닳도록 외우는 반야심경에 뭐라고 했지요? 
  지혜라는 것도 얻어질 것이 없고(無智亦無得) 어떤 것도 얻어질 수 있는 게 없다(以無所得故) 해 놨어요. 그게 뭔 소리예요? 왜 그 말을 했을까요?

[대중2] 그대로가 다 부처님입니다.

[스님] 그럼 부처라는 말로 얻어지는데? 안 되거든. 그러니까 일체 어떤 걸로도 얻어질 수가 없다. 왜 그럴까요?

[대중] 본래 자성 속에 있는 거니까 밖에서 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니가 무엇인지를 알면 자득(自得), 깨닫는거지 어디서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성 불성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스님] 자성 불성이라고 말을 하면 얻어지거든요. 뭐라고 말을 만들어서 붙이면 벌써 얻어지는 거잖아요. 
  반야심경에 이무소득이라 하고, 금강경에서 3세심불가득이라 했는데, 금강경 속에 반야심경이 다 들어있는 거라요.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게 뭔 말이지요? 뭘 모든 상(諸相)이라는 거예요?
  상(相)이라고 할 때, 보통 바깥에 드러나 있는 이 모든 모양만 가지고 생각을 하는데, 금강경에서는 항상 사상(四相)이라는 그게 근본주가 돼요. 근본주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게 주가 되는 거라요. 이 사상을 근본적으로 항상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거고, 거기에 따라서 바깥의 모든 모양이라는 것도 복합적으로 거기에 따라와서 포함돼 있는 그런 말인데요. 모든 사상(四相)과 밖으로 있는 모든 모양 이런 걸 다 포함해서 상이라고 하는 거라요. 그 상이 다 허망하다(凡所有相皆是虛妄). 모든 모양에서 비상(非相)을 본다면 곧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여래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 중생들은 상만 보는데, 부처님은 非相(모양 아닌 것)까지도 본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들의 마음을 본다는 겁니다. 
  마음을 볼 줄 알아야지 비로소 선사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세상 사람은 마음은 못 봐요. 전부 다 겉모양만 보지. 마음을 딱 꿰뚫어보는 것이 중요한 거야. 자기 마음을 먼저 깨달아 알아야 되거든. 자기 마음을 알아야 천하인의 마음을 볼 수 있어요. 그래야지 모든 사람과 마음에서 소통이 다 잘 되고 통할 수가 있어요. 마음과 마음끼리 소통이 안 되면 거기에서부터 서로 시비가 생기고 등을 져야 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마음을 볼 줄 알아야 돼요. 
 
('22.12.04 학림사 대원스님 소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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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고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기서 힘을 쓰라는 거다.
무엇일까 하는 그 의심 하나만 일으키면 탁 깨닫는다.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거기서 들여다 본다, 관한다, 살펴서 또 해 나가는 게 있으면 못 깨달아진다.
무엇일까 하는 그 의심은 일체 언어, 상식, 지식, 사량 분별, 모든 것이 끊어져서 넘어간 세계이며, 본지풍광, 본성의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알지 못하고 다른 생각으로 사량분별로 뭘 알려고 한다던지, '답이 있겠지' 하고 해답을 생각해 본다든지 이러면 공부하고 거리가 멀다.

오직 무엇인고 의심하는 것만을 본인이 애쓰면 거기서 깨쳐진다. 사상(四相)이나 육폐(六蔽:간탐,파계,진에,해태,산란,우치 )나 오음(五陰), 번뇌, 진구(塵垢)가 몰록 공해서 무너질 때 바야흐로 스스로 볼 수 있다. 그때 그 본 것을 말로 드러낼 수는 없고 오직 자신만이 알 뿐이다.
(학산대원-반야심경 법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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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그런데 무엇인고 하시잖아요?
[대중] 네.
[스님] 해 들어갈 때 망상 일어나잖아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많이 일어나지요? 
[대중] 네.
[스님] 그 망상 일어나는 걸 보고 깨닫는데, 어떻게 깨닫느냐? 망상을 보고 자기가 망상인 줄을 긍정해주지 그렇지요?  
[대중] 네. 
[스님] 망상이라고 긍정해주고 아는 그 자신, 그놈은 망상이 아니다 이거라. 
[대중] 네. 
[스님] 망상 아닌 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알았다 이거야. 그럼 이제 그 사람은 망상에 휘둘리지 않아. 어떤 것이 일어나도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건 아닌 줄 알아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면 자꾸 제거되고 제거되고 제거돼서 향상일로로 계속 확 올라가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비워지고 없어져서 무한대하게 마음이 넓어져 커져요. 무한대한 마음의 세계를 맛을 볼 때 충족, 만족을 느끼고 희열, 기쁨을 느낍니다. 틀림없습니다. 엄청난 희열, 기쁨을 느끼는 게 있습니다. 아주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있어요. 어째서 그걸 느끼게 되느냐? 아니다 아니다 하고 자꾸 파고 올라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요. ‘아니다!’ 알겠어요?
  무엇인고 하다가 '본래 이게 나고 내가 이거라 했는데 그런 건가?’, ‘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이런 생각이 들어가면 그건 아니에요. 일체 그런 생각이 없고,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긍정, 인정을 안 해줘. 자기한테 일어나는 거, 이거는 망상이다. 아니다.   망상인 줄 아는 실체, 이놈은 뭔가 탁 돌이켜 보면 탁 깨닫는 게 있어요. ‘아하. 이거는 일체가 아닌 것을 내가 괜히 끄달려가지고 속았구나.’ 그때 하는 소리라.   이건 말로 배우면 안 되고, 이건 내가 공부해가지고 알아서 하는 소리를 지금 말로 미리 배우는 건데요. 집에 가서 해보면 내가 한 말을 '아 그때 그 스님 말씀이 맞네.' 하고 계합이 돼요. 알겠어요?
  무엇인고 할 때 일어나는 생각을 그걸 긍정을 하지 마라. 인정하면 안 되거든. 딱 버려. '이건 아니다 아니다. 그럼 이게 뭐지? 나는 본래 뭐지?’ 그러는 게 자꾸 비워지는 거야. 아니다 아니다 하는 것은 밭에 풀을 제거하듯이 자기한테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제거하고 제거하고 올라가서 자꾸 향상일로로 나가는 거라. 
  '무엇일까?’ 자꾸 그것만 해들어가는 거라. 다른 건 안 해.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이건 아니야! 뭐지?' 하고 그렇게 하다가 어떻게 깨닫느냐?   나아가고 나아가다가 더 나갈 곳이 없는 데 가서 탁 부딪히면, 그때 깨달음이 있어요. 자기를 발견하게 돼. '아하! 이 놈이 돌이켜 보니 본래 망상도 아니고 모든 일체가 아니구나.’ 아닌 걸 알았다 이 말이야. 그거는 해봐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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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공부하려고 하면, 자꾸 망상이 나고 졸음이 오는데 어쩝니까?

[답변]
공부하다 일어나는 그런 문제의 모습을 본인이 보고 안다는 거다.
그래서 자꾸 공부하는 건데, 본래부터 잠 자는 물건이고, 본래부터 망상인 것 같으면 공부할 필요가 뭐 있어? 계속 잠으로 망상으로 살아가야지.
그런데 그건 아니란 말이야.
망상 아닌 놈이 있어. 잠이 왔지만 잠이 아닌 놈이 있다. 그러니 역력히 알지.
본래 잠 안 오는 놈이 있기 때문에 잠 오는 것을 알고, 본래 망상 아닌 놈이 있기 때문에 망상이 나는 줄 안다 이거다.
공부해 들어가면서 그걸 깨닫는 거다.
본인이 가만히 공부해 보면 아하! 하고 발명(發明)하는 게 있다. 그건 완벽하고 영원하다. 그건 지식이 아니다.
('18.8.19 대원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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