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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영원한 자유" 중에서 - 불교의 처음과 마지막

선사선담

by 노하시원 2016. 9. 2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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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선담))

-성철스님 법문집 "영원한 자유" 중에서. "영원한 자유" 한 권을 아래와 같이 한 개의 이어진 글로 엮어 보았습니다.-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품(方便品)>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十方國土中 唯有一乘法)"고 하고 있습니다. 일승(一乘)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가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이승(二乘), 삼승(三乘)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설은 비록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이승과 삼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혜능)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편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된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을 쓰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 자성(自性)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속에 있으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 속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 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곧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으로 불교의 골수를 드러내 보이는 말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불생불멸을 깨치셨으니, 불생불멸은 불교의 근본 원리인 것입니다. 일체 만법, 곧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의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하는데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여기에서 말하는 '이 법'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곧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이 모두가 불생불멸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늘 머물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나고 없어지지만, 그것은 다만 겉보기일 뿐이고, 실제의 내용에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은 또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곧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래의 모습은 모두가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만번 변화를 거듭하더라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면 불교에 대해서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상주불멸(불생불멸, 부증불감)은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너지와 질량이 같다. 핵분열로 질량이 에너지가 되어 폭탄이 되는 원리. E=mc2)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본 그런 성인이십니다.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바위는 분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분자는 원자가 모여서 생긴 것이고, 원자는 소립자가 모여 생긴 것입니다. 소립자는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는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4차원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이 융합된 세계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 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통해버리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지닌 본래의 능력, 본래의 시력은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은 의식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 눈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두 눈이 빠져 버린 사람도 무엇이든 다 볼 수 있습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으로 육근이 서로 막혀 있지만 부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면 사람은 누구나 육근호용이 되어 귀로써 보고 눈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이미 우주를 보는 망원경을 통하여 입증이 되었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물방물 한개에 9억개나 되는 벌레가 있다는 말씀도 현미경을 통하여 입증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불생불멸을 말하면서 이렇게 현대물리학을 도입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가 아니라 극미세한 상황까지 설정하여 이야기를 펼친 것은,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그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양변을 떠나고 또한 양변을 포함하는 불교의 중도공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발달을 거듭하면서 자꾸 불교쪽으로 가깝게 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 발달될수록 그 내세우는 바가 좀더 확실히 증명이 되고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이 찬탄합니다. 이렇게 해서 3,0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대과학의 이론으로 입증됨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이기에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설령 원자탄이 천 개, 만 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이 있고 육도윤회 생사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곧 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원리의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는 실체를 말할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제8아라야식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나눌 때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제6의식이라고 하고, 그 안의 잠재의식은 제7말라식이라고 하고, 무의식 상태의 마음은 제8아라야식이라 합니다.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고 혈맥이 끊어지고 목숨이 끊어져 버리면 의식은 완전히 없어지고 오로지 제8아라야식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몰식, 곧 죽지 않는 식, 없어지지 않는 식이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할 것 없이 모든 기억을 마치 곳간에 물건을 간수해 놓듯 전부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어떤 기회만 되면 녹음기에서 녹음이 재생되듯 기억이 전부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말할 때 무몰식이라고 하고,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뜻에서 말할 때는 장식이라 합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미래겁이 다 하도록 윤회를 하는 동시에 무엇이든 한번 스쳐간 것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티베트 승려들의 비서인 [사자의 서]를 보면, 숨이 끊어질 때에 밝은 광명을 경험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본래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윤회사상에 의하면 영혼은 따로 거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을 거듭하면서 몸을 바꾸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윤회와 불교의 윤회의 법칙인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는 여러 실례 보고서 등으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이제 문제는 영혼이 있고,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받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은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교의 근본 목표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토록 계속해서 윤회를 하여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악업은 많이 지어도 선업은 많이 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고를 받고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자성을 깨쳐서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가 따릅니다. 미래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원리입니다.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찍이 선문(禪門)에서 조사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 곧 불교의 근본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며 잊기도 하지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 이라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원오스님은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자유에 이르는 길, 곧 영겁불망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숙면일여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위(位)에서입니다. 제8아라야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의 자재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느니 죽는니 하는 것은 꿈 속에 사는 눈먼 중생들이 하는 말이요, 참으로 꿈을 깨서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열리면 부처님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함을 보고 들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시방세계에 다니시며 중생을 구하십니다. 우주 전체의 중생들이 정성만 지극하면 한날 한시에 다같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신통력 갖추고 널리 지혜 방편 닦아 시방 모든 국토에 어느 곳에든 현신 않는 것이 없다." 달이 뜨면 천 개, 만 개의 강에 달이 비치듯이 부처님은 시방세계 어느 곳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아주 돌아가 없어졌다면 모든 기적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그 정성의 정도에 따라 가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꿈 속의 중생들이 대하는 부처님이어서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어 법의 눈을 뜨면 부처님을 항상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속히 마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흔히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것, 곧 생각이 일어났다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데, 이러한 생멸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염기염멸하는 그 생각이 없으면 생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하여, 제8아라야식의 근본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까지 모두 끊어지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체고를 벗어나 구경락을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이며, 중도세계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 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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