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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관(觀)은 자기를 바로 보라는 것. - 대원스님

선사선담

by 노하시원 2022. 6. 8. 02:35

본문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들어 보이시고)

  아시겠습니까?
  직하(直下)에서 바로 보아서 계합을 해서 알 것 같으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가장 큰일을 해결하게 됩니다.
  큰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밖으로의 모든 경계에 구속을 받고 있고, 인생에 있어서 나고 죽는 생로병사의 구속을 받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안으로 우리 자신들의 내면세계의 망상심에 사로잡혀서 구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느 곳을 가도 해야 할 일이 없는 무사인(無事人)으로서 걸림이 없이 일체 모든 행(行)을 하는 대만족을 이루고 사는 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사람(了事人)입니다.
  이 일은 이 산승이 법상 위에서 말 없이 묵연히 앉아있다가 주장자를 들어서 보여드린 여기에서 척 알아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장자를 들기 전에 말없이 묵묵히 앉아있을 때 서로 척 보아서 바로 알아차리는 것은 일구(一句) 이전 소식입니다. 일구(一句) 이전에 알 것 같으면 부처님과 조사님과 동등한 스승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다시 산승이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것을 일구(一句)라고 합니다. 일구(一句)에서 계합이 되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말없이 들어 보였을 때 가섭이 미소한 그 경지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부득이 입을 여는 것입니다. ‘회마(會麽 아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제3구입니다. 여기서 알아차리는 것은 자기 자신도 구하기 어려운(自救不了) 미둔한 근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대중은 어느 근기에 속합니까?
  악(喝)!
  야차두보살면(夜叉頭菩薩面)
  귀도곡불도장(鬼搗穀佛跳墻)
  야차의 머리요, 보살의 얼굴이라
  귀신은 방아 찧고, 부처는 담장을 넘어가네.
  여러분이 대답이 없어서 제가 대신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운문 스님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청정법신입니까(如何是淸淨法身)?”
  “여섯(六門)으로는 거둘 수 없다(六不收).”
  원오 극근 선사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길,
  “하나도 세우지 못함이로다(一不立).”   여기에 대하여 송하기를,
  육불수(六不收) 일불립(一不立) 
  청정법신하처멱(清淨法身何處覓)
  야래일진취엽풍(夜來一陣吹葉風)
  소진부운월조벽(掃盡浮雲月照壁) 
  육근으로 거둘 수 없고, 하나도 세우지 못함이니,
  청정법신을 어느 곳에서 찾겠는가?
  밤 사이에 한바탕 바람이 불어와서
  뜬구름을 걷어치우니 밝은 달이 벽을 비춤이로다.

  이 게송으로 간단하게 그 중요한 물음에 대한 깊은 뜻을 몽땅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이루어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우리 인생이 정말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멋지게 잘 살고 가는 건가, 이것을 여러 방면으로 연구를 해 나오면서 많은 걸 발전시켜 왔습니다.
  물질을 많이 발전시키고 여러 가지를 많이 발전시킨 이 시점에서도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괴로움 자체는 완전히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많은 종교가 범람을 하고, 많은 과학, 예술 등이 도출되어서 이 괴로움을 해결하고 영원히 편안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없을까 무단히 노력을 하고 추구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편안함과 즐거움과 행복함을 이 땅에 완전하게 정착시키고 살 수 있는 어떤 것도 이룩하지 못했고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 이 세상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게 가르치신 진리에 의해 공부를 해서 많은 분들이 괴로운 구속에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몸을 벗으려면 옷을 갈아입듯이 자유롭게 벗고, 또 몸을 벗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일체 모든 구속과 속박을 받지 않고 우주 하늘 땅 위에서 대자유의 행복과 평화를 만끽하고 살아간 분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 세상 많은 분들이 인류를 위해서 무한한 여러 가지를 밖으로 만들어냈지만, 실지로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됐습니다.
  제가 요번에 미국에 가서 교회 강당에서 법회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서양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불교의 선(禪)에 있다고 합니다. 나를 바로 보는 데서 인류가 갈망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자기들이 보기에 신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매달리고 별별 곳에 매달리고 밖으로 추구해 봤지만, 결코 완벽하게 이룩할 수는 없었고,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바로 보는 데 모든 해결책이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딴 게 아니고 ‘관(觀)’입니다.
  이 관(觀)을 잘못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법회를 하는 중에 교포와 미국인 두 교수가 뭘 묻길래, 내가 “관(觀)”이라고 대답하니,
  “그건 우리도 압니다.”
  “뭘 어떻게 아는가?”
  “가만히 호흡을 하면서 나를 본다든지, 몸을 움직이는 마음을 본다든지, 아니면 숨 쉬는 걸 센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었지 않습니까?”
  “그대는 볼 관(觀)자에 대한 건 꿈에도 보지 못했소.”
  그러니 깜짝 놀라면서,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관(觀) 말고 딴 게 있습니까?”
  “참 큰일 났네.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
  “미국에 다른 큰스님들이 와서 법문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책을 봐도 그렇게 돼 있던데요? 해골을 관하는 것도 있고, 송장을 관하는 것도 있고, 관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觀)에 대한 건 꿈에도 보지 못했소.”
  “스님은 이 외에 다른 관법이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있지.”
  “뭡니까?”
  “방금 그대가 말한 관이라는 건 중생 차원에서 부처의 세계를 올려다보고 거기 가기 위하여 조작으로 지어가는 것이지, 부처님이 말하는 진짜 관(觀)은 그게 아니다. 금강경을 봤는가?”
  “예.”
  “금강경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 했는데, 그것도 꿈과 같다, 거품 같다, 그림자 같다, 이렇게 관하는 거라고 알아들었는가?”
  “그런 식으로 관하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거 참 큰일났네. 이렇게 하니 불교의 진수를 모르고 바로 전해 줄 수가 없지. 잘못된 거지.”
  “그럼 다른 것이 있으면 스님께서 말씀해 주세요.”
  “부처님이 말씀한 관(觀)이라는 것은 ‘바로 보라’는 거다. 너는 바로 볼 수 있는가?”
  “뭘 어떻게 바로 봅니까?”
  “운문 스님에게 ‘모든 부처님이 나오신 곳은 어디입니까?(如何是諸佛出身處)’하니 ‘동산이 물 위로 간다(東山水上行)’ 했다. 너는 이걸 바로 보고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관(觀)은 이걸 바로 본다는 말이다.”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부부 집에 친구가 찾아왔는데, 남편이 부인보고 눈을 꿈쩍하니 부인이 방에 들어가서 다과상을 잘 차려서 나왔어요. 친구가 ‘이 사람들 참 멋지게 사네. 나도 집에 가서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집에 가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어요. 그래서 부인을 불러서 눈을 꿈쩍하니 부인이,
  “왜 그래요? 눈을 꿈쩍하면 어쩌란 말이오?”
  “아 눈 꿈쩍하면 알아들어야지, 자꾸 딴말하냐?”
  그래서 부인이 ‘친구가 왔으니 외출한다는 말이구나’ 하고 외투를 가져와서 주니까, “그게 아니고 차 한잔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걸 몰라?”
  “그럼 그렇게 말을 하지 왜 눈을 꿈쩍꿈쩍해요?”
  그제서야 가서 차를 가져 왔습니다. 그렇게 눈을 꿈쩍할 때 그 뜻을 바로 보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1700공안이 볼 관(觀)자 안에 다 속해 있어요. 빗장 관(關)이 관(觀)에 속해 있어요. 이걸 사람들이 모르더라구요. 선지식이라는 분들한테도 많이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해요. 관(觀)이 다른 줄 아는데, 관(觀)은 그냥 관법(觀法)인 줄 대다수가 알고 있더라고요. 아닙니다.
부처님이 관(觀)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관(觀)을 ‘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관(觀)’은 ‘지혜’라고 해석도 다 되어 있습니다. 
  일체 모든 만법을 바로 보라 이겁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바로 보고 알아차리라 이겁니다. 부처님이 바로 보고 바로 알라 하신 겁니다. 
  요사이 남방의 위빠사나 그건 중생 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지어서(造作) 주시(注視)하는 것인데, 보고 관찰하고 느끼고 알아차림입니다.
  간화선에서는 “조사가 오신 뜻이 뭡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했을 때, 그걸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는 걸 말합니다. 그걸 간화선에서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따라가고, 사자는 사람을 문다(韓獹逐塊 獅子咬人)’라고 했습니다. 사자는 돌을 던지면 돌 던진 범인을 바로 보고 가서 물어요. 그런데, 개한테 돌을 던지면 영락없이 돌을 따라갑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거기서 잣나무를 끌어안고 있으면 그건 한로축괴(韓獹逐塊)입니다. “앞이빨에 털났다(板齒生毛)”하면 털 난 걸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말하는 그분의 의지를 바로 보고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이게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학자들한테 말했습니다.
  “간화선이 왜 중요한 줄 압니까? 간화선은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이게 부처님이 말한 거 하고 조금도 어긋나는 게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말씀하고 주장하신 겁니다.”
  그런데 송장을 관하고 숨 쉬는 걸 관하는 그건 중생 세계에서 모든 걸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에, 중생은 참선을 시키려고 해도 업이 두터워서 안 되는 겁니다. 안 된다고 하니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이 ‘너 참선이 안 되니까 놀아라’ 이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진짜 나를 바로 보는 참선은 제쳐놓고, 구구하게 치료하는 ‘방편선’으로 주시하고 느끼고 알아차리는 걸 가르칩니다. 그 사람을 참선할 수 있는 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예비훈련을 하는 거라고 봐야 됩니다. 그 방법을 부처님이 제시합니다. 
  “너 숨은 쉬지? 숨 쉬는 걸 가만히 들여다 보는 건 할 수 있겠지?”
  “그건 해 볼 만 합니다.”
  그래서 앉아서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걸 주시해서 보고 있으니 자연히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고 산란하고 복잡한 생각이 가라앉는 거예요. 복잡한 생각을 가라앉히는 임시적인 치료법입니다. 그게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한번 관해서 쉬어지면 완전히 없어져야 되는데 그건 아니잖아요? 주시하는 걸 자꾸 해 나가야 마음이 안정이 돼요. 나중에 마음이 안정이 되고 난 뒤에,
  “요새는 어떠하냐?”
  “마음이 잡념이 없고 편안합니다. 이대로 편안한 그것만 보고 있어야 되는 가요?” 
  그 고요한 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도 하나의 병통이 되고 업(業)이 됩니다. 이건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게 목적이 아니거든요. 깨닫는 것이 목적이지요.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지, 그걸 끌어안고 영원히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건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방편적으로, 기초적으로 가르쳐서 그 다음 단계로 부처님이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 편안한데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어찌해야 됩니까?”
  “너가 지금 편안하다고 느끼는 그놈은 도대체 뭐냐? 편안하다고 느끼는 그놈이 뭔지 알고 있느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걸 한번 생각을 해 보라.”
  그래서 부처님이 ‘무엇인가?’라는 걸 제시해 줍니다. 그때부터는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이뭣고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일체인의 스승(능인사)이라서 이 사람을 이렇게 다스리고 저렇게 다스리고 하는 약방문을 너무 잘 알아서 끌어올려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른 나라의 위빠사나 관법을 해 가지고 완벽하게 자기 인생을 해결해서 마쳤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걸 가르칠 완벽한 스승도 없고요. 부처님은 그걸 하셨는데.
  그래서 십 년 동안을 앉아서 숨 들이쉬고 내쉬는 걸 해봐야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고  마음만 고요해졌다는 거예요. 그걸 안 하면 또 안 돼요. 일생동안 그걸 계속하면 마음 편안한 건 유지해 나간다는 거예요. 그걸 ‘치료법’이라고 해요. 저번에 관법하는 외국사람이 와서 마음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한 ‘치료법’으로 이걸 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하더구만.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걸 해결해서 영원히 공부를 안 해도 완벽하게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데, 중국 조사스님들이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나를 바로 보고 바로 알게 하는 걸 제시해서 가르친 게 ‘간화선’이에요. 그렇게 해서 중국에 무수히 깨달은 사람이 나왔습니다.
  운문스님 같은 분은 시자가 물 떠오고 밥 가져오면, “시자야!” “예.” “무엇인고?” 물어서 시자가 말 못하고 있으면 “너 그것도 모르고 있어?” 하고 때립니다. 매일 시켜서 들어가면 “시자야. 무엇인고?”하고 대답 못하고 있으면 멱살 잡고 확 밀어버리면 나가 떨어지고, 그렇게 3년 동안을 해서 시자가 깨달았다는 겁니다.
  위빠사나 관법을 하면 일생을 해도 깨닫는 건 없어요. 나도 초창기 행자 때 이걸 해 봤습니다. 마음은 고요해지는데 아무 것도 아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도 없어요. 안 하고 놀면 또 망상이 나요. 그러기 때문에 자꾸 해야 돼요. 그래서 처음에 해보면 뭐가 되는 것이 표가 나는데, 나중에 가보면 결국 별 게 아니라요. 
  그렇게 헛고생을 할 게 아니라 바로 직방으로 가라 는 겁니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라 이겁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 “앞이빨에 털이 났다” 이건 바로 가르쳐 준 건데, 듣는 쪽에서 바로 척 알아차리면 되는데, 바로 못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는 건 구차스러운 제2의 방법입니다. 본래 이런 건 없는데 간화선에서 구차스럽게 제2의 방법을 제시해 놓은 것이 운문 스님이나 대혜 종고 스님으로 내려오면서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너가 바로 보고 바로 못 알아차리면 ‘왜 그랬을까? 도대체 저분이 뭣 때문에 그랬을까? 원인이 어디에 있는 건가?’ 그걸 깊이 의심해서 파고 들어가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 당시에 달정이라는 이가 조주스님을 찾아와서 묻길,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
  달정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이 됐습니다. 바로 알아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대중들은 바로 해결이 안 되니,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 그걸 지극히 생각해서 일주일만에 계합을 해서 ‘아하! 이런 의지였구나!’ 알고, 또 1년, 2년, 3년 만에 해결하는 사람이 있고, 6년을 해서 깨달은 사람이 있고, 얼마나 지극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게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는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간화선이 볼 관(觀)자 속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관(觀)은 지혜입니다. 지혜라고 해석도 이미 되어 있어요. 주시해서 보는 그런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진짜 큰 의지는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그걸 어디다 비유했느냐? 사자는 바로 보고 사람을 문다(獅子咬人) 이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바로 못 보잖아요. 현실 가정생활 속에서도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린다면 가정 생활에 불협화음이 없을 것이고 정말 편안하고 행복이 충만할 거고, 이 세상이 전부 다 그럴 겁니다. 완전히 만족한 생활을 합니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린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든, 사업하는 사람이든, 여러분이 살아가는 속에서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합니까? 잘못 판단하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조사어록도 해석해 놓은 거 보면 기가 찹니다. 이상하게 해석해 놓은 게 얼마나 많은지요. 조사스님 뜻은 꿈에도 못 보고 딴말을 해놓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과거에 도솔암, 동화사 등 선방에 다닐 때인데, 어느 수좌가 “육조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했고, 서장에는 대혜종고선사가 이렇게 말했고…” 이런 말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엉터리라. 
  “육조단경에 어디 그런 말이 있어? 그렇다면 육조스님은 선지식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
  “육조단경에 그래 놨는데, 스님은 알지도 못하고 그런 말을 합니까?”
  “그래? 육조단경 가져와 봐. 한번 보자.”
  그래서 걸망에 가져다니던 육조단경이 가져와서 펴려고 하는데 내가 묻길,
  “가만히 있어 봐! 너 해석해 놓은 걸 봤나, 한문 원서를 보고 말하느냐?”
  “저는 한문 실력이 없어서 해석해 놓은 걸 봤지요.”
  “그러니까 그렇지. 다시 펴 보아라.”
  그래서 원문을 내가 바로 새겨줬습니다. 
  “이렇게 해야 육조스님 뜻에 가까이 가는 말이 된다. 내가 말한 거 하고 비교해 보라.”
 그러니 5분 동안 가만히 있더니,
  “그러고 보니 잘못됐네요. 그러면 해석해 놓은 게 잘못 됐네요?”
  “그렇지. 해석이 잘못됐지.”
  또 어떤 수좌가 그래요.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약왕보살이 염부제 중생에게 이 약왕보살본사품을 일러주지 말라고 해놨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상하다. 약왕보살본사품을 일러주지 말라고 했다고?”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 나도 선방에 다닌지 오래 돼서 경전 내용을 잊어버려서 잘 모르지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책을 한번 보자.”
  그래서 법화경을 가져오기에 펴보니, 원문 내용은 염부제중생에게 일러주라는 것인데, 해석을 일러주지 말라는 것으로 해놨습니다. 완전히 틀린 거라요. 기가 막히더라니까요. 
  그것 뿐 아니고 요사이 많이 나와 있는 선어록에 해석이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니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 싹 빼 버리고 해석도 안 해 놓았어요. 그런 게 지금 많습니다. 
  이래서 공부를 하는 이들이 책을 잘못 봐 가지고 버리는 사람이 많고, 또 이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도 이뭣고를 잘못하는 사람도 많아요.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게 안에 따로 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육조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한 것은 몸뚱이 끌고 다니는 뭔가 따로 있는 걸 묻는 게 아니라, 오음(色受想行識)의 요소가 하나로 뭉쳐진(一團之物) 몸뚱이 전체를 두고 묻는 겁니다.
  “너는 뭐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전부 다 아닙니다.
  예전에 월래 묘관음사 향곡스님도 그러시고, 고암스님도 그러시고, 법주사 금오스님도 그러셨습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고 무조건 아니라고 해라. 너 요만큼이라도 ‘이거다’ 그러면 너는 공부 못하니 가라.”
  헛일이고 아무 소용없다 이거라. 일체가 아니니, 그때 너를 돌이켜서 ‘그럼 나는 뭐지?’ 이렇게 해서 깨달아서 알고 나면 진짜 대답이 하나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여타 공부하는 방법이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만, 전부 다 그건 꿈속에서 헤매고 딴 길로 가는 거라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돼요.
  그러나 이뭣고나 무(無)자나 화두를 지극히 파고 들어가면 반드시 여러분이 근본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이걸 확신을 가지고 지극히 해야 됩니다.   요새는 선지식 노릇하기도 어려운 건데, 과거에 금오스님 같은 분은 무조건 한 방 때립니다. 들어가서 물으면 그냥 주장자 한 방 날립니다. 겁이 나서 못 들어가요. 근접도 못 합니다. 다른 큰스님들도 과거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고 가끔 갑자기 가다가 돌아서서 “너 뭐냐?” “왜 무라고 했느냐?” 들이대고 물어요. 모르면 한 대 때려요. 그러면 우리는 맞고 분통이 터져서 잠이 안 오고 그래서 그냥 밀어붙이니 되더라니까요.
  나도 과거에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경책하니까, 전부 다 욕을 하고 돌아가요. 뭘 아는 척 한다 하며 전부 싫어하고 도망을 가요. 그러니까 안 된다 이거예요.
  나는 과거에 선지식 모시고 살며 한번도 그냥 지나간 적이 없어요. 꼭 들어가서 물었어요. 맞든 안맞든요. 참말로 그건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아무도 안 갑디다. “스님이나 가시오.”하고 안 가버려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특별한 안목은 없어요. 도리어 나를 욕하지요. 아는 소리 한다고 그러면서.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됐어요. 이래 돼선 절대 안 됩니다. 앞으로 이걸 개선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토요일날 여기 오신 건 복이 많다고 봅니다. 딴 거 없어요. 가장 중요한 거는 기초적으로도 그렇고 초학자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나를 바로 보는 이게 참 하기 쉬워요. 본래 ‘무엇인가?’ 하는 퀘션마크(Question Mark 물음표)가 그대로 붙어 있어요. 이건 얼마든지 하기 쉬운데.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한 번 잘해봅시다.     一震驚天地(일진경천지)
   轟轟不是聲(굉굉불시성)
   何勞勤苦覓(하로근고멱)
   時至自然明(시지자연명)
   한번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놀란다
   요란한 소리가 나더라도 이것은 소리가 아니더라.
   어찌 수고로이 찾고 있는가?
   돌이켜 보는 목전에 자연히 밝아 있느니라. 

(2015-10-17 토요법회 대원스님 법문) 다음카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 편집 여산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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