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염송 21권 855영양
855. 영양 (羚羊)
홍주(洪州) 운거도응(雲居道膺) 선사가 시중하였다.
“어떤 사람이 세 관(貫)의 돈을 가지고
사냥개 한 마리를 샀는데,
자국 남긴 종적(踪跡)만을 찾으니,
만일 산양이 뿔을 걸 때엔 자취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숨소리까지도 듣지 못한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산양〔羚羊〕이 뿔을 걸기 전엔 어떻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6·6은 36 이니라.”
스님이 절을 하거늘 선사가 말하였다.
“알겠는가?”
스님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보지 못했는가? 자취가 없다고 했느니라.”
나중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이를 이야기했더니,
조주가 말하였다.
“운거 사형이 아직 있었구나.”
스님이 물었다.
“산양이 뿔을 걸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가 대답하였다.
“9·9는 81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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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일(薦福逸)이 송했다.
산양이 구봉(甌峯)에 뿔을 거니
사냥개는 어리둥절하여 자취를 못 보더라.
그러나 석교(石橋) 다리 가의 노장은
3천 리 밖에서도 만날 줄 안다.
승천종(承天宗)이 송했다.
좋구나, 6·6은 원래가 36이니
자취를 찾는 사냥개가 어찌 알리요.
설사 글발이 주옥(珠玉) 같아도
산양이 뿔을 걸 때와 같을 수 있으랴.
지해청(智海淸)이 송했다.
산양이 뿔을 건 때는
6·6이 36이라.
가난한 사람이 옛날 돈을 얻었고
여윈 말이 마른 조〔栗〕를 먹는다.
참선하는 사람들게 알리노니
무생곡(無生曲)을 들어라.
지난밤에 불길이 허공을 태웠는데
불 속에 뛰어들어 목욕을 했었다.
백운병(白雲昺)이 송했다.
운거는 6·6은 36을 외쳤고
조주는 완전히 81을 제창했다.
산양〔羚羊〕이 뿔을 걸어 자취가 없거늘
사냥개는 컹컹대며 어디를 찾는가.
찾을 곳이 없음이여,
다시 소식을 통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먼 하늘과 한 빛깔이라.
열재(悅齋) 거사가 송했다.
6·6은 36 이라니
두 왕비의 눈물이 소상강의 대를 물들였다.
9·9는 81 이라니
양주(楊州) 가호(賈胡)가 강적(羗笛)을 비껴 들었다.
강적을 가로 듦이여,
6·6도 9·9도 소식이 없으니
가을 바람 몰아쳐서 갈대꽃을 흔든다.
낭야각(瑯瑘覺)이 염하였다.
“운거가 이렇게 제창하니,
마치 여덟 자 베 적삼에 소매는 열두 자인 것 같구나.”
법진일(法眞一)이 이 이야기를 들고,
이어서 어떤 스님이 장경(長慶)에게
“산양이 뿔을 걸기 전엔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장경이 “풀 속의 사람이니라”하고 대답했고,
스님이 다시 “뿔을 건 뒤엔 어떠합니까?”하고 묻자
장경이 “어지러이 부르짖느니라”하고 대답했으며,
스님이 다시 “끝내 어떠합니까?”하고 묻자
장경이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또 오느니라”하고 대답한 것을 들어 말하였다.
“이 세 존숙의 대화를 평해 보라.
사람들을 위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산양이 뿔을 건 뒤가 뿔을 걸지 않는 때와 같은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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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說話)
『승보전(僧寶傳)』에서는
“선사의 이름은 도응(道膺)이니
유주(幽主) 옥전(玉田)사람이요,
성은 왕씨(王氏)이다.
10세에 출가하여 발우 하나만 들고
남쪽으로 와서 양개(良价)를 뵈었다”고 되어 있다.
『종경록(宗鏡錄)』에 이르기를
“운거(雲居)는 물외(物外:佛家)의 종사로서
이 땅에서 일곱 차례 태어나신 선지식이다.
도덕이 고매(高邁)하시고 지혜의 바다가 드넓으시며,
대자비를 갖추시니, 항상 천 명의 무리가 모였다”고 하였다.
무릇 종사나 선지식이 설법하실 때에
비유를 먼저 들고 법을 나중에 설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법을 먼저 설하고 비유를 나중에 들기도 하며,
혹은 법과 비유를 함께 들기도 하고,
혹은 비유만 들기도 하고,
혹은 법만 들기도 하는데
이 화두는 비유만 든 단유(單喩)의 형식이다.
“어떤 사람〔如人〕”이라 함은
종사와 선지식이요,
“세 관의 돈〔三貴錢〕”이란
3구의 법문〔三句法門〕이다.
“돈〔錢〕”이란 두루 통하는 법재(法財)요,
“사냥개〔一隻獵狗〕”란
미친 근기〔狂機〕가 잘못 이해한다는 뜻이며,
“샀다〔買〕”함은 제접한다는 뜻이다.
“자국 남긴 종적(踪跡)만을 찾으니,
만일 산양이 뿔을 걸 때엔 자취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숨소리까지도 듣지 못한다.”고 함은
『본초(本草)』에서는
“산양〔羚羊〕은 밤에 잠을 잘 때에
뿔을 나무에 걸어 땅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아무런 자미도 없고 찾을 길도 없는 언구(言句)라는 뜻이다.
어떤 것이 산양이 뿔을 건 경지의 언구인가?
본분종사(本分宗師)가 내뱉는 언구가
낱낱이 더듬어 찾을 길이 없는 것을 이른다.
만일 눈에 티가 끼었다면
비록 언어를 끊고 지킨다 해도 미혹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자취가 거칠면 보기 쉽고,
기식(氣息, 냄새와 숨소리)이 가늘면 알기 어려우므로
의당 “기식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취도 보지 못한다” 해야 할 터인데,
지금(본칙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냥개〔獵狗〕는 기식을 찾을 뿐
자취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산양이 뿔을 걸었을 때엔
자취는 가늘고 기식은 거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사는 3구의 법문으로
미친 근기들의 잘못된 이해〔狂機謬解〕를 제접하는데
미친 근기들의 잘못된 이해는 다만 자취를 찾는다.
만일 본분활구(本分活句)를 만난다면
이치〔成理〕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언구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산양이 뿔을 걸기 전엔
어떻습니까?〔羚羊未掛角時如何〕”하고,
또 “산양이 뿔을 건 뒤엔
어떻습니까?〔掛角後如何〕”한 것은
뿔을 건 것과 걸기 전을 가려서
〔分踈〕물은 것이다.
“6·6은 36”이라 함은
세간의 수법이니, 이는 뿔을 걸었다고 말한 언구이나
뿔을 건 것과 걸기 전을 역시 가리지 않았다.
“보지 못했는가?
자취가 없다고 했느니라〔不見道無踨迹〕”한 것과
“스님이 모르겠습니다〔僧不會〕”함은
과연 사냥개가 자취를 보지 못한 대목이다.
“운거 사형이 아직 있었구나〔雲居師兄猶在〕”함은
살이 아직 따뜻하니, 어찌 죽었다〔遷化〕하겠는가 함이니,
마치 “아직도 그런 것이
있었구나〔猶有這箇在〕”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9·9는 81”이라 함은
이 또한 세간의 수법인데 이치는 각기 다르니,
그 이치는 알 수 있을 것이다.
6은 음수(陰數)요, 9는 양수(陽數)이니,
이 논리가 맞는다면 6·6이 36은 마치 산양이 뿔을 걸었을 때
소리와 메아리 자취와 발자취를 모두 찾을 수 없다는 뜻이요,
9·9는 81은 소식을 소통시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백운이 송(頌)하기를
“운거는 묘하게 36을 외쳤고,
조주 노인은 온전히 81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천복(薦福)의 송에서
“구봉(甌峰)”은 운거산에 구봉이 있기 때문이요,
“3천 리 밖〔三千里外〕”은 3구 밖이니, 3구가 사라진 곳이다.
그러나 다시 9·9는 81이라 했어야
이야기가 비로소 원만해진다는 뜻이니,
이것이 3천리 밖에서 만날 줄 아는 것〔三千里外解相逢〕이다.
승천(承天)의 송은
운거의 뜻을 읊은 것이니,
운거 쪽에서 본다면 조주가 비록 주옥이 영롱하고
돌돌 구르지만 손과 발을 붙일 수 없다는 내용이다.
지해(智海)의 송에서
“가난한 사람이 옛날 돈〔古錢〕을 얻었고…
…”라고 한 것은 견해가 고고하고 담박하고 적멸하다는 뜻이요,
“참선하는 사람들께 알리노니〔報與參玄人〕”이하는
조주의 9·9는 81을 송한 것이다.
법과 법이 생멸(生滅)이 없음이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는 것 같다 했으니,
그렇다면 운거의 경지는
진짜 무생법(無生法)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운(白雲)의 송에서
“묘창(妙唱)”과 “전제(全提)”는 설화 속에서 이미 밝혔고,
“산양〔羚羊〕이……”는
운거뿐 아니라 조주도 역시 뿔을 걸었다는 뜻이다.
“사냥개〔獵犬〕……”라 함은
스님이 두 선사의 뜻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요,
“지는 노을〔落霞〕……”이라 함은
조주의 경지이며,
“가을 물〔秋水〕……”이라 함은
운거의 경지이다.
열재(悅齋)의 송에서
“두 왕비〔雙妃〕……”는 자재하지 못하다는 뜻이요,
“양주(楊洲)……”는 자유자재하다는 뜻이며,
“6·6……”이라 함은
두 구절 모두가 더듬어 찾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낭야(瑯瑘)의 염은
머트럽지 않은 묘한 활용이 본래부터 구족하다는 내용이다.
법진(法眞)의 거화는
운거와 조주를 두 축으로 삼고,
장경(長慶)의 경지를 중간으로 삼는 내용이다.
“사람들을 위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爲人在什麽處〕”함은,
뿔을 건 곳에 있는가 뿔을 걸지 않은 곳에 있는가 함이니,
뿔을 건 곳과 걸지 않은 곳을 모두 찾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같은가, 다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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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15권 592 여사(驢事)
영운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선사가 답하였다.
"나귀의 일이 가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도다(여사미거마사도래 驢事未去馬事到來)
스님이 알아듣지 못하여 다시 설명해 주기를 청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채색의 기운은 언제나 밤에 움직이고, 정령은 낮에 만나지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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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청이 송했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닥쳐오니
종소리 끝나자마자 북소리 재촉한다.
조사가 잡곡밥을 즐겨 먹으니
북쪽의 오대산에는 문수가 있다.
보녕용이 송했다.
동쪽으로 갈 때는 서쪽의 이익을 보지 못하고
남쪽에서 싸게 사서 북쪽에서 비싸게 판다
가로는 천이요, 세로는 백이라 하여 항하사를 세나니,
9*9가 도리어 82가 되었네.
육왕심이 송했다.
나귀의 일이 가기 전에 말의 일이 닥쳐오니
가고 옴에 먼저 티끌 밟기 면하지 못하리.
어찌 한산이 습득을 만나서
손뼉치고 깔깔대고 웃은 것만 하겠는가?
심문분이 송했다.
나귀 앞, 말 뒤에서 영운을 아니
눈앞에 가득한 바람결엔 먼지 하나 없도다.
천태산과 안탕산을 두루 다녀서
돌아오니 또다시 금강의 봄을 구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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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說話)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오다(驢事馬事去來)'라고 함은
세간의 예삿일로 대답한 것인가?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오는 분분한 곳에서
모름지기 영운의 뜻을 알아내냐 일생 행각하는 일이 끝난다.
그러기에 나귀의 일과 말의 일에 뜻이 없지 않다.
"채색의 기운은 언제나 밤에 움직이고, 정령은 낮에 만나지지 않느니라."라 함은
사실의 뜻에서 보면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재빨리 스쳐가기 때문에 정령을 만나는 일이 적으니,
정령이란 문채에 떨어지지 않는 경지라 하거니와
이 풀이는 틀리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이 가고 올 때에
모름지기 정령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해 낸 것이다.
장산의 송에서 처음부터 '북소리 재촉한다'함은
일반적인 말이요.
'조사가 잡곡밥을 즐겨 먹으니 '는 밥 먹기 전의 일이니,
말의 일이다 나귀의 일아다 하는 것이
종소리 북소리여서 잡된 모습이나
그것이 바로 조사들의 행리처이다.
'잡곡밥'이라 함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마명이 설법하는 여가에 화라기도 잘했다.'하니,
화라는 잡되다는 뜻이다.
또 발우를 이르는 말인데,'
갖추어 말하면 발화라니
발우에 담은 밥이다.
또 딴 곳에서는 잡곡밥이라고도 말했다.
"북쪽의 오대산에는 문수가 있다."함은
"망념을 여읜 청정함..."의 뜻이니,
서로 따른다는 뜻이다.
보녕의 송에서
'동쪽으로 갈 때는 서쪽의 이익을 보지 못하고
남쪽에서 싸게 사서 북쪽에서 비싸게 판다
가로는 천이요, 세로는 백이라 하여 항하사를 세나니'은
허다한 것임을 밝힌 대목이요,
"9*9가 도리어 82가 되었네."는 셈으로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육왕심의 송에서 처음부터 '먼저 티끌 밟기 면하지 못하리.'함은
완전히 오고감에 젖어든 것 같으므로 먼저 길에 젖어들었다고 하였다.
" 어찌 한산이 습득을 만나서
손뼉치고 깔깔대고 웃은 것만 하겠는가?"는
깨달음과 교화가 동시라는 뜻일 뿐
이 이치를 취한 것은 아니니,
그가 먼저 길에 젖어들었다는 뜻을 보았기 때문이다.
심문의 송에 "나귀 앞, 말 뒤에서 영운을 아니"은
모름지기 이곳에서 영운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요,
"눈앞에 가득한 바람결엔 먼지 하나 없도다."은
궤칙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요,
"천태산과 안탕산을 두루 다녀서"함은
앞의 "한산이.."라 한 뜻이니,
깨달음과 교화가 있음을 인증한 뒤에는
도리어 먼지 바람이기 때문에
'다시 금강의 봄을 구경하네"라고 하였다.
정전백수자와 참선 관련 대원스님 강설 중에서 (0) | 2022.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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