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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고?' 회광반조(回光返照) 하라. - 대원큰스님. 학림사 오등선원.

선사선담

by 노하시원 2023. 2. 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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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녹음법문도 좋지만, 직접 앉아서 서로 궁금하고 알고 싶은 그런 것을 주고 받는 시간을 가져볼까 해서 내가 제안을 하였다.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한뭉치의 몸뚱이(赤肉團上) 에 고불가풍(古佛家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생각으로 구하려고 하면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알려고 하면 더욱 몰라지는 것이고, 사량분별로 이치를 따지면 더욱 막히는 것이다. 
  메뚜기가 짝을 업고 있으면서 자꾸 짝을 찾는 것과 같이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바로 보고 알면 되는데, 그건 놔두고 별따로 뭘 구하고 깨달으려고 하니까, 없는 걸 억지로 만들려고 하는 격이 된다. 허공을 아무리 손으로 파본들 흔적이 있는가?
  생각으로도 이치로도 사량분별로도 안 되고, 언어문자로도 안 되고, “본래 고불가풍과 조사가풍을 다 가지고 있는데 왜 따로 구하느냐?” 하는데서 바로 해결이 돼야 된다. 여기에는 할(喝)과 방(棒)이 아무 소용없다. 모르니까 그걸 당하고 있지, 아는 이한테 할(喝)을 했다가는 “무슨 되지도 않은 할을 하느냐?” 하고 혼나는 거다. 방(棒)이 왜 필요하겠나? 까막눈들이라 할 수 없어서 패는 거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거다.
  본래 이대로 여러분이 적나나(赤裸裸) 적쇄쇄(赤灑灑)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 같고, 맑은 물을 뿌린 것과 같은 깨끗한 경지인데, 달리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고 해도 전연 감이 잡히지 않고 밋밋하기만 하고 고불가풍이 있는지 없는지 실감이 안 난다는 사람이 있다.  
  “나는 적나나 적쇄쇄한 것 같지도 않고, 당최 뭔지 잘 모르겠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이런 사람한테 필요한 한마디가 무엇일까?
  아는 사람 있으면 한 번 말해보라.
  왜 꿀 먹은 벙어리야? 뒤에서 이러니저러니 아는 체하고 떠들지 말고 한마디 해 봐.
  (여러 대중이 대답을 했다.)
  모든 사람이 들으면 함께 공감이 되는 그런 한마디가 필요한 거다. 
  그때 필요한 한마디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는 건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똑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를 돌이켜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관법, 사선정 팔해탈까지 다 섭렵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다 아니라고 버리고 앉아서 일주일 만에 깊은 선정에서 뭔가 깨달았다는 것인데, 그게 자기가 ‘도대체 이것이 뭐냐?’ 반조해 보는 데서 해결이 됐다는 것이다.
  ‘이걸 나한테 누가 바로 일러줬더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헤매고 고생을 안 했을 것을.’
  나에게 이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관법도 하고 별별 희한한 걸 가르쳐 주는 대로 다 하고, 죽을 고생을 하고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자기에게 돌아와서 나를 반조해 보는 데서 해 마쳤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고?’ 이것이 반조다. 무엇인고라는 의심이 들어가지 않고는 절대 깨치지 못하는 거다. 

  내가 처음에 절에 들어와서 행자 때, 노전에 계시던 편강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일본의 전문대학을 나온 분으로 학식이 고매하고 묵조관법(?照觀法)을 해서 나름대로 일가견을 이룬 종장이었다. 나는 행자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분이 종장이고 큰스님이라는 걸 알았다.
   그분이 나에게 묵조관법(?照觀法)을 가르쳐주는데, 좌복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안으로 호흡을 코로 들이마셔서 아랫배 단전에다가 모으고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는 거다. 숨을 들이쉴 때 아랫배 단전이 볼록 튀어나오게 힘을 주면 바가지처럼 동그랗게 튀어나오는데, 그러면 그걸 보는 거다. 또 조금씩 숨을 토해내면서 그걸 또 보는 거다. 숨 토할 때 옆에서 들으면 무당들이 휘파람 소리내는 그런 소리가 났다.
  그걸 해보라고 해서 하니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상당히 편안했다. 그런데 하루라도 거르면 안 되고 계속 해야 된다. 그렇게 해보니까 마음은 편안한 곳에 안착이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항상 고요한 걸 취득해가지고 고요한 곳에서 끌고 나가는 거다. 끊임없이 그걸 해 나가는데, 깨달음이라는 건 모르겠고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좋긴 하였다. 
 그렇게 하는 중에 누가 말하길, 그렇게 할 때 관세음보살 부르는 걸 함께 하면 더 좋다는 거다. 안으로 ‘관세음~’하면서 관을 하라는 거라. 숨을 토하면서 거기다가 ‘관세음~’을 붙이라는 거야. 그렇게 하는 게 더 좋다고 해서 또 그걸 했다.
  그래 하다 보니까 나중에 뭐가 환히 알아지는 게 나왔다. 상대방 심리도 환히 들여다보이고, 며칠 후에 누구한테 배달부가 편지를 가지고 오는 게 보였다. 3일 후에 신도가 몇 사람이 온다고 전부 다 나타났다. 마을사람이 생남불공하려고 오면 저 사람은 요번에 생남불공하면 아들 놓겠다 안놓겠다 하는 게 다 나타났다. 그래서, ‘야 이게 무슨 도를 통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조실 만옹 스님이 찾아오셔서 요즘 무얼 하느냐고 물으시기에 이러한 일을 말씀드리고, “제가 견성한 게 아닐까요?”라고 여쭙자, 스님이 “잘못하면 절에 무당 하나 나오게 생겼다” 하시며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이것이 무슨 법문을 했는고?” 하셨다. 그 말씀에 그만 앞뒤 생각이 다 끊어지면서 캄캄한 절벽이 되어 지난날 알았던 것도 다 없어지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니, 주장자로 어깻죽지를 때리면서 “네가 환히 안다며 왜 대답을 못하느냐?” 하고 경책하셨다.
  그 길로 공양실에 가서 밥을 하는데 ‘무엇일까?’ 의심이 불길처럼 일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엌도 없어지고, 솥도 없어지고는 부엌 안에 활활 타는 불무더기가 둥근 달과 해처럼 우주에 꽉 차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솥 안에서 끓는 소리와 김이 나는 소리가 나는데 따끔하여 깨어나 보니 고무신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그 찰나에 그동안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오도송을 지어서 만옹 스님께 보여드렸다.
 
  竈內火光蓋天地(조내화광개천지)
  鼎中湯聲脫古今(정중탕성탈고금)
  柱杖三下是何法(주장삼하시하법)
  目前歷歷只底是(목전력력지저시)
  부엌 안에 한무더기 빛나는 둥근 불빛 천지를 덮고
  솥 안에서 끓는 한 소리 옛과 이제를 벗어났음이라
  주장자 세 번 치면서 무슨 법문이냐 하니
  목전에 역력해 다만 이것뿐이로다.

  만옹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절에 와서 30년을 절밥을 먹어도 밥만 썩히지 이런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가는데, 행자 너가 밥값을 했구나!” 하면서 칭찬하셨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무엇인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거다. 무엇인고에서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인고에서 바로 깨닫게 돼 있다. 여기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일차적인 모든 문제를 딱 끝낼 수 있다. 그러는 동시에 거기에서 다시 한 번 진일보해서 번신일전(飜身一轉)할 수 있는 상두관(上頭關)을 투득해야사 비로서 부처님이 밟았던 자리, 조사가 밟았던 자리를 모조리 투득했다 할 수 있다.
  이뭣고에서 일단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그러면 거기서 다시 선지식을 만나서 상두관을 타파할 수 있는 가르침을 받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과 조사가 밟았던 자리를 절대 지나가질 못한다.
  회광반조하라는 건 무엇이냐?
  ‘나는 무엇인고?’ 하면 앞뒤 일체가 끊어진다. 무엇인고 이것은 사실 바로 다 가르쳐 준 건대도 어리석어서 모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일체가 끊어진 전후제단(前後際斷)이라 입만 달싹해도 방망이가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이다. 땅을 치고 소리 지르고 이런 것 다 소용없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무엇인고?’ 이것인데, 여기서 힘을 쓰면 아주 간단하다. 가만히 애써 나가다 보면 거기서 아하! 하고 알아차린다. 깨닫는다는 말은 딴 게 아니고 알아차린다는 거다.
   자유당 시절에 열차 타고 가는데 열차 안에서 누가 이상한 짓을 자꾸 해. 우스워서 거기 시선이 끌려가서 보다가 나중에 열차를 내리고 보니 돈이 하나도 없어. 거기서 아하! 하고 알았다는 거다. 그놈이 그 짓 할 때 바로 알아차리면 안 속는데, 돈 잃어버린 뒤에 알아차려서 늦는 거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온 곳입니까?”
  “동산이 물 위로 간다.”
  이랬을 때, 눈이 있는 놈은 바로 알아차린다. 이건 깨닫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된다. 무엇인고에서 해결이 돼야 그런 말을 들으면 전광석화와 같이 바로 알아차린다. 그걸 지혜의 검이라고 한다. 여러분의 지혜의 검은 빠르기가 번갯불보다도 빠르다. 여러분이 이 말을 잘 알아들어야 된다.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 물으면, 
  “바로 지금 이놈이야! 뭐가 더 있어?”
  “본래 말로 할 수도 없고 언어문자를 떠나 있다. 다만 이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알아가지고 노다지 그놈을 끌어안고 사람 만날 때마다 그 소리하고, 모든 걸 거기다가 잣대를 대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과거에 그런 사람한테 내가 물었다.
  “시장에서 호떡을 샀는데, 손에 있을 때는 호떡이었는데, 땅에 놓고 보니 만두더라 하니 왜 그렇소?”
  그러자 대답하기를,
  “만두나 호떡이나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장에 앉아서 호떡을 가지고 만두라고 팔면 현행법에 사기꾼으로 체포돼서 감옥에 가는데, 그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런 말을 하시오?”
  그러니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 현실성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부로 막 해서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러시오?”
  야단을 쳤더니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요새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안 먹은 게 먹은 것이고, 먹은 게 안 먹은 것이다. 한 게 안 한 것이고, 안 한 것이 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면 그걸 굉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눈이 열린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면 곤란해진다. 
  “그래? 먹은 게 안 먹은 거고, 안 먹은 것이 먹은 것이라고?”
 그러면서 귀싸대기를 한 대 갈긴다. 
  “왜 때려?”
  “때린 게 안 때린 거고, 안 때린 게 때린 거야!”
  이러면 어쩔 것인가? 이건 말도 못하고 꼼짝 못하고 당한다. 그건 자기가 목을 내놓고 ‘나 죽이시오’ 하는 소리라.  물러날 길도 없다. 절단 난다. 
  ‘이 자리는 본래부터 돼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예를 들어서, “불법이 뭡니까?” 물으면 손가락을 세우면서 “본래 이 놈이지” 하고, 또, “어떤 것이 밥입니까?” “어떤 것이 국입니까?” 하고 뭐든지 물을 때마다 손가락을 세우고 “본래 이 놈이다” 이러면 그 대답이 맞겠는가?
  자기가 안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가 병이다.  나는 이런 걸 알은 바가 있다 하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잣대로 재다 보면 모든 걸 그르친다. 그걸 ‘법상에 집착한 사람’이라고 그런다. 안 된다는 말이다.
  분명코 공부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먹은 게 안 먹은 것이다’ 하는 것도 없는 건 아니다. 그것도 답습을 하고 지나가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럴 때 일단 일차적으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모든 생각은 아니라고 해야 된다.  ‘이건 아니다.’
  아까 여러분이 모두 대답을 하긴 하던데 그건 아니거든. 내가 바라는 맞는 대답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기 생각 가지고 맞느냐? 아니야. 일단은 여러분이 자기가 어떤 요만한 생각이라도 알았다 하는 게 있다면 다 버려야 된다. 다 없어야 된다.
  단지 알지 못해서 ‘무엇일까?’ 잠을 자나 누우나, 앉으나 서나, 무엇일까 하는 여기에서 일초도 딴 게 스며들면 안 된다. 딴 이물질이 스며들면 헛일이라. 그냥 무엇일까 하는 거기서 진일보해 나갈 뿐이라.
  그래야지, 무엇인가 하는 거기서 “본래 말 할 수 없고, 본래 이름도 모양도 언어문자 일체를 떠났고 양변을 떠난 중도실상인 본래 이 자리 아닌가?” 이 따위 이런 생각했다가는 천리만리나 어긋나는 거야. 공부 못해 그 사람은. 헛일이야. 일체를 다 버리고 오직 앞뒤가 끊어져서 모를 뿐이라. 몰라서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래도 때리고 저래도 때리고, 전부 다 아니라고 때리거든. 과거의 선지식이 그랬다. 무슨 말만 하면 아니라고 때려. 그래서 꽉 막히는 거야. 
  내가 만옹스님이 “이 주장자가 무슨 법문을 했는고?” 한데서 캄캄하게 막히듯이 그렇게 돼야 된다. 몰록 다 잊어버린다. 알아졌던 것도 다 없어져 버린다. 다 무너져버려.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데 어떤 것도 생각을 두지 마라. 뭐냐 이럴 때 거기 가서 어떤 생각도 삽입을 시키지 마라. 어떤 것도 절대 용납을 해서는 안 된다. 
  거기서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잠을 자면서도 무엇인가라는 걸 하고 있어. 자기도 몰라. 또 일 하면서도 한다. 일 하면서도 일 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도 모르는 걸. 전연 모르고 다 잊어버려. 그냥 무엇인가 뿐이라. 그 경지를 겪어봐야 공부한 사람이야. 그 경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공부한 사람 아니다. 되도 안 했어. 가짜 여우새끼가 앉아서 지랄하는 거지. 아니야.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완전히 이 일을 해 마칠 수 있는 게 딴 게 없고, 오직 무엇인가라는 것뿐이야.
  그래서 과거에 조사스님이 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학인이 와서 물은 거야.
  “스님은 요사이 어떻습니까?”
  “어느 때는 곡식을 다 뽑아버리고, 어느 때는 곡식과 풀을 가려서 뽑지.”
  다음에 가서 다시 묻길,
  “스님! 요사이는 어떻습니까?”
  “나는 다못 이것 뿐이니라.”
  이 말은 공부해서 24시간 다른 잡된 생각이 없이 순수히 무엇인고만 되는 그걸 지나간 사람이라야 그 소리가 나온다. 안 그러면 절대 그 소리가 못 나온다. 
  그래서 공부는 좌복에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니야. 어디 몸뚱이가 공부하는가? 몸뚱이가 공부하면 산이나 바위돌은 다 돼 있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앉아서 좌선하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앉거나 서거나 생활하는 속에서 이 마음이 화두를 지어가는 거지 몸뚱이가 화두 지어가는 건 아니야. 무슨 완전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으면 잠이 안 오고 뭐가 어떻고 하면서 작당하고 다니는 그런 무리들이 또 있어. 가부좌라고 하는 건 원래 인도의 요가야. 기본자세라. 반가부좌를 하든 완전가부좌를 하든 간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화두 일념을 지극히 밀고 나가야지. 
  일어나서 밖에서 다닐 때도, 좌복에서 죽비 치면 일어나면서 그만 잊어버려. 일어나면서 그만 딴 생각이라. 내가 보니까 그래. 문 열고 나가서 저 먼 데 볼 때 벌써 없어. 화두는 없고 딴 데 보고 있어. 그게 아니거든. 앉아서나 일어서나 오나 가나 화두를 잡도리해서 지어가는 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여러분이 화두를 지어가도록 애를 써야지, 이게 가장 빨리 가는 지름길이고 해결하는 길이라.
  무엇인고에까지 갖다 대 놓은 거는, 호흡법을 해 가지고 갈려고 하면 수천 억겁을 지나야 무엇인고에 비로소 올 수 있어. 관법에 고골관, 수관법, 수식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관법을 해서 이뭣고에까지 올려고 하면 수천 겁을 해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애석하다. 이걸 나에게 누가 바로 일러줬으면 그렇게 고생을 안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는 부처님이,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회광반조(回光返照) 하라.” 하셨다.
  조사들은 그걸 듣고 그대로 했어. 그러니까 조사들이 “이렇게 쉽고 빨리 되는 걸 가지고, 왜 오래 할 것이 없는 걸 이렇게 했는가?” 전부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 아니야?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건 수천만 겁을 당겨서 일찍이 다 되게 해준 거야. 거기서 조금만 애쓰면 된다. 무엇인가 이거 하나를 지극히 해서 먼저 우선적으로 해결이 돼야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시간이 한 시간 됐으니 마쳐야지. 나는 십분 됐는 줄 알았는데 벌써 한 시간 됐네? 그럼 오늘 이걸로 마치고, 오늘 저녁에 한번 해봐요. 해보면 틀림없이 돼요.
(2012.06.16 소참법문)

- 학림사 오등선원 카페 여산 거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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